2004년 국산 아케이드 게임 바다이야기가 출시됐다. 파칭코에서 게임 시스템을 따온 이 게임은 이용자들에게 '대박 환상'을 심어주며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현금을 직접 지급하지 않고 대신 상품권을 지급한 뒤 그 상품권을 환전소에서 다시 돈으로 바꿔주는 방법 등으로 경찰의 단속도 피해갔다. 심각한 중독성과 도박성으로 많은 이들이 평생 모은 재산을 탕진했다. 바디이야기 사태는 현재의 게임물관리위원회가 탄생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바다이야기'가 최근 다시 소환됐다. 게임사들이 미래 먹거리로 점찍은 '돈 버는(P2E) 게임'의 국내 서비스 허용을 두고 혼란이 빚어지면서부터다. P2E게임을 놓고 사행성과 정보의 불투명성 등을 우려해 인정하지 않으려는 규제당국과 신사업으로 평가하는 일부 게임사가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기존 수익 모델이 한계에 다다랐고 신기술이 사업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는 점에서 게임업계가 처한 환경이 18년전과 유사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시 온라인 게임에 밀려 수익원이 감소한 아케이드 게임사가 돌파구로 내놓은 게 바다이야기다.

P2E게임은 블록체인(암호화폐)과 대체불가능토큰(NFT)등을 활용해 게임 내 자산을 현금화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용자가 아이템 및 재화 등을 구매하는 기존의 과금 모델이 한계에 봉착한 가운데 게임업계 신수익모델로 급부상했다. 학계 등 일각에서는 "게임이 돈과 엮이면 극단적인 중독·사행성 게임이 나올 수밖에 없다"며 보수적인 접근을 주문하고 나섰다. 이러한 가운데 세계 최대 게임 플랫폼이 선제적으로 블록체인과 NFT를 기반으로 한 P2E게임 차단에 나서 주목된다.

26일 게임업계 등에 따르면 1억 2000만명의 활성 이용자를 보유한 세계 최대 게임 유통 플랫폼 '스팀(Steam)'은 최근 NFT와 암호화폐 기술을 적용한 게임의 입점을 원천 차단하고 가상화폐 교환 행위를 금지시켰다. 사실상 P2E게임이 플랫폼에서 등록은 물론 배포될 수 없도록 막은 셈이다. 또 블록체인 게임 개발사를 연이어 퇴출시켰다.

뜨거운 국내 열기와는 달리 해외에서는 P2E게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게임 속 자산을 현금화하는 것이 결국 사행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게임의 본질인 '재미와 놀이문화'를 흐려 일종의 노동이 되고 결국 게임 산업의 수명을 단축시킬 것이라는 염려도 나온다. 여러 논란과 규제 이슈가 명확해질 때까지 주요 플랫폼들이 P2E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이유다. 업계 거물들도 연이어 경고음을 내고 있다. 거대 게임 플랫폼인 마이크로소프트의 필 스펜서 부사장은 "NFT 게임 모두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게임들은 다소 착취적인 느낌이 든다"면서 "다소 공격적인 NFT 게임들에 대해서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앤드루 윌슨 일렉트로닉아츠(EA) 대표는 "NFT와 P2E 게임이 우리 산업의 미래라고 불리지만 그것이 어떻게 작동할지 알기엔 아직 이르다"며 불확실성을 경계했다. 팀 스위니 에픽게임즈 대표는 "에픽게임즈 스토어는 블록체인 게임을 환영한다"면서도 "우리 게임엔 크립토(암호화폐)를 쓰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게임을 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수익이 나는 구조를 꼬집어 P2E 게임을 폰지사기에 빗대기도 한다. 어느 한 사용자가 돈을 벌었다면 누군가는 돈을 지불해야 하는 구조라는 것. 이에 대해 중국 최대게임플랫폼 X.D 네트워크의 최고경영자(CEO) 황이멍은 최근 "성인들을 위한 NFT 기반 P2E 게임은 폰지사기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돈을 버는 게임(Play to Earn)이 '돈을 써서 버는 게임(Pay to Earn)'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가장 유명한 P2E게임 엑시인피니티의 경우 초기 진입자들이 게임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펫(엑시) 3마리가 필수로 있어야 하고 별도의 수수료(가스비)를 지불해야 한다. 펫 1마리의 가격은 0.1이더리움(약 48만원)에 달한다.사실상 게임을 제대로 플레이하기 위해서는 요즘 기준으로 약 150만원 이상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게임업계 한 관계자는 "대부분의 P2E 게임들은 특정 아이템을 채굴하고 이를 가상화폐로 바꾸는 방식"이라면서 "문제는 헤비 과금러가 통제 가능한 그들만의 채굴장을 만들어, 과금한 돈을 회수하는 경쟁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입장료를 꾸준히 내고 들어오는 이용자가 없으면 결국 코인 가격이 폭락하는 구조라 지속가능성에도 의구심이 제기된다. 최근 엑시인피니티 코인 가치는 5개월 만에 1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대다수 이용자들이 게임 코인을 현금화하는 탓에 코인 가격이 급락한 것이다. 엑시인피니티는 한때 이용자들이 월 평균 70만~100만원의 수익을 올리면서 동남아 등지에서 생계수단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코인 가격이 폭락하면서 이들의 소득도 최저 임금 아래로 떨어졌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즈(FT)는 "최근 게임 분석가들이 엑시 인피니티의 지속성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며 "상당 부분 새로운 플레이어에 의존하는 방식"이라고 언급했다. 국내 첫 P2E 게임 무돌삼국지의 코인 가격은 한때 200원까지 치솟았다가 최근엔 6원 수준까지 폭락했다. 이 게임은 한때 "30분에 1만원을 벌 수 있다"고 입소문을 타면서 20대는 물론 10대 청소년들까지 대거 몰린 것으로 알려졌다.

게임사가 마치 '중앙은행'처럼 권력을 독점하는 구조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들이 운영하는 게임 내 가상자산이 증발하거나 입출금 서비스가 갑작스럽게 중단될 경우 피해가 고스란히 사용자들에게 전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규제당국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김규철 게임위 위원장은 지난달 토론회에서 "거래 기능을 뺀 블록체인 기술과 NFT는 환영하지만 그러면 게임사는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기술을 도입하지 않을 것"이라며 "기업이 유행처럼 NFT를 몰고 가지만 게임위까지 기업 유행을 따라갈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검증 안된 게임들이 난무할 경우 P2E 게임 자체가 사행과 사기의 온상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게 규제당국 우려다. 위정현 한국게임학회 회장(중앙대 교수)은 "P2E와 NFT 등이 합법화되는 순간 소셜카지노 등 사행성 게임들이 밀고 들어와 '환전성'을 미끼로 제2의 바다이야기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게임 속 자산을 현금화할 수 있도록 완전히 풀어줄 경우 제대로 된 P2E게임이 뒷전으로 밀리고 도박에 가까운 게임들이 난무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제 올해 게임위가 퇴출시킨 '바다이야기류' 게임만 50여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와 비교하면 두배 가까이 늘어난 숫자다.

일부 게임사는 NFT·블록체인 게임 개발과 출시를 유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P2E 열풍이 이어지는 가운데 국내 게임업체 내부에서도 "새로운 방식이 아니며, 게임의 재미를 떨어뜨릴 수 있다""피해가 고스란히 이용자들에게 전가될 수 있다"는 의견이 조심스럽게 나오는 분위기다.

[황순민 기자 / 김대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