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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祖 타짜’ 장병윤이 말하는 ‘도박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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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은 호구(虎口)’를 물색하는 ‘사기 도박단’은 기술을 부리는 ‘타짜’와 기본 판돈을 대는 ‘모도(꽁지)’, 전체 구도를 그리는 ‘설계’, 바람잡이 또는 병풍 역할인 ‘바지’, 간식거리를 팔고 추임새를 넣는 ‘박카스’ 등으로 구성된다. 도박단은 유흥가와 조선소·자동차공장 등 해당 지역 중 ‘돈이 많이 도는 곳’에서 급조됐다가, ‘공사’가 끝나는 즉시 해산한다. 장씨는 그렇게 산청 지리산, 부산 서면·광복동, 광주 충장로, 대구 자갈마당, 서울·인천·의정부 등을 돌아다니며 도박판을 싹쓸이했다. 사창가(私娼街) 다락방부터 선상(船上)까지 모포만 깔면 어느 곳이든 ‘하우스’가 됐다. 기술은 세 가지였다. 미리 숨겨 놓은 패로 바꿔치기를 하고, 밑 장을 빼서 원하는 패를 손바닥에 달고, 특정한 패를 ‘바지’나 ‘꽁지’에게 밀어주는 거였다. 특히 전주(錢主)가 판돈의 70%를 따게 만들고, 30%는 호구가 다시 가져가게 만드는 게 원칙이었다. 타짜가 계속 따거나 호구가 돈을 한꺼번에 다 잃으면, 게임을 의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씨의 ‘밑 장 빼기’에 당한 어느 졸부(猝富)는 하룻밤 새 17억원을 날린 적도 있다. 장씨는 표적 한 명에게 5년간 공을 들여 ‘한탕’을 치기도 했다.      장씨도 태어날 때부터 노름판을 전전한 건 아니었다. 유년시절, 장씨의 꿈은 만화가였지만 세상은 그를 ‘어둠의 길’로 몰았다. 유복했던 가세가 급격히 기울고, 앨범비가 없어 초등학교 졸업장도 못 받은 채 그는 맨몸으로 상경했다. 불과 14세 때였다. 농장 한편에서 명절선물용 곶감을 포장하던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국민학교 5학년 때 그림만 그렸다 하면 미술 선생님이 옆에 와서 칭찬을 해주셨지요. 중학교 포기하고 시골서 만화만 그렸어야 했는데…. 이리저리 흘러 어쩌다 보니 이렇게 ‘화투판의 동냥아’가 돼버렸지요.”       만화가의 꿈은 며칠 만에 구겨졌다. 청계천 다리 밑 빈민촌으로 들어갔다. 또래 거지들과 구정물을 튀기며 한동안 주먹다짐을 한 끝에 겨우 ‘꼬마 행상(行商)’ 노릇을 할 수 있었다. 겨울이면 동대문 상가에서 미제(美製)껌·찹쌀떡·메밀묵을 떼다가 종로3가·세운상가 다방으로 팔러 다녔다. 여름에는 비닐우산, 아이스크림, 해삼·멍게로 업종을 바꿨다. 당시 왕십리 쪽에 있던 배명고등학교 앞에서 리어카를 세우고 튀긴 콩도 팔았다. 소주컵에 담아 대(大)자는 10원, 소(小)자는 5원에 팔았다.         룸살롱 주방장, ‘돈뭉치’ 들고 튀다      어느 날 20대 초반의 청년이 와서 ‘10원어치’를 달라고 했다. 어린 장씨는 장사가 안돼 기쁜 마음에 덤까지 얹어줬다. 청년은 오른손을 호주머니에 넣는 듯하더니 대뜸 “내가 가진 게 100원짜리라 90원을 거슬러줘야겠다”고 말했다. 장씨가 의심 없이 거스름돈을 건네자 말이 바뀌었다. “저기 대문 열린 곳이 우리 집인데 곧 갖다 주겠다”던 청년은 신호등이 바뀌자 반대편으로 부리나케 도망쳤다. 놀란 장씨가 뒤를 쫓았지만 다리에 맥이 풀려 곧 넘어지고 말았다. 며칠간 매상을 눈앞에서 다 날린 셈이었다. 난생처음 ‘사기’를 당한 장씨는 그때부터 이상한 오기가 샘솟았다. 세상에 대한 적의(敵意)를 품고 사회의 밑바닥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영등포 ‘서북관’에서 일식을 배워 주방장을 했고, 명동 중국대사관 앞에서 포장마차를 열었다가 불량배들하고도 대판 싸웠어요. 그러다 안주 맛이 좋다고 소문나 ‘돌살롱’이라는 술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비싼 외국 양주들을 테이블에 넣었는데, 한 손님이 당시 돈으로 10만원짜리 수표를 술값으로 냈어요. 우리 주인이 옆 가게에서 ‘현금으로 바꿔오라’고 했는데 거기도 돈이 없어 전액을 100원짜리 지폐로 바꿔줬어요. 한 보따리가 되더군요. 어린 나이에 큰돈을 만져서 들떴는지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도망쳐버렸어요. 첫 범죄였습니다.”      들고 튄 10만원을 쪼개 형제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돈으론 대구 요정(料亭)에서 여자들을 끼고 술을 마셨다. 그때가 장씨 나이 스무 살 되던 해였다. 뒷골목 행상으로 잔뼈가 굵은 몸에, 나름 사기도 당해보고 범죄도 저질러 보니 더는 거칠 것이 없었다. 다시 부산 룸살롱을 전전하며 돈을 모아 달걀 도매점을 차렸다. 첫 아내와 인연을 맺어 자녀도 낳고 살았다.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배달 오토바이가 고장 나 수리점에 갔더니 한창 화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구경하다 몇 번 끼어든 게 잘못이었다. 미리 앉아 있던 상인 3명이 ‘젊은이가 잘해서 못 이기겠다’며 자꾸 치켜세웠다. 부산의 ‘준(準)타짜’들이었다. 걸려든 장씨는 그날 매상부터 오토바이까지 다 갖다 바치고 말았다. 복수심에 불탄 그는 당시 개봉한 도박영화 〈스팅(The Sting)〉을 보고 ‘기술 연마’에 돌입했다. 타짜들을 찾아가 직접 배우기도 했다.         “하루 13시간 牌만 섞었다”    타짜의 주특기로는 패를 섞고 나눠줄 때 밑 장을 빼는 일명 ‘밑 장 빼기’ 기술이 있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굳은살이 박일 때까지 “하루 13시간 동안 패만 섞었다”는 장병윤씨는, ‘3년 걸린다’는 타짜의 세계를 두 달 반 만에 섭렵하게 됐다.  “근데 이놈들이 (단독 기술이 아닌) 2인조가 쓰는 것만 알려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나중에 따로 유심히 보니까 이 패를 미는 게 다르더라고. 손가락을 모아서 밀든지, 그 사이가 벌어지든지…. 한참 졸라갖고 배운 게 바로 화투나 카드를 1장씩 치는 거예요. 그게 제일 기본입니다. ‘착착착’ 치면서 1장이고 2장이고 내 마음대로 섞을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훈련이 되면) 3장을 겹쳐서 할 수도 있어요. 그걸 매일 13시간 동안 죽어라 했어요. 그러니까 패턴이 다 읽히더라고요. (패에 매겨진 점수에 따라) 합한 수가 얼마인가, 이 사람에게 뭘 주고 쟤한테 얼마를 주는 걸. 혼자 계산을 계속해 보니까 서서히 화투가 되더라고요.”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터지기를 거듭, 굳은살이 박일 때까지 ‘패 섞기’는 계속됐다. 패를 섞고 나눠줄 때 맨 밑 장을 빼는 기술부터, 바로 그 위의 패를 빼서 섞는 것까지 다 섭렵했다. 장씨의 주특기 ‘밑 장 빼기’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3년 걸린다는 타짜의 경지를 두 달 반 만에 오른 것이었다. 8년 걸린다는 포커도 2년 만에 끝냈다. 장씨에게 ‘갓접기’(패를 배분·수거하는 과정에서 가장자리를 몰래 접는 기술)와 ‘뚜껑 열기’(패를 빠르게 돌리는 사이에 그림을 미리 읽는 것)는 초보자들이 쓰는 유치한 수법일 정도였다. 보통 화투 기술자를 ‘타짜’, 카드 기술자를 ‘마귀’, 카지노에서 속임수를 쓰는 딜러를 ‘블랙딜러’라고 하는데, 이 세 가지가 다 가능한 도박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바로 장씨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타짜가 되고 보니까 주변의 타짜들이 보이더라고요. 나이트클럽 주임, 사창가 포주, 유명 가수까지…. 영화에서는 (아귀·짝귀 등) 별명을 갖고 다니는데, 실제 타짜들은 알려지는 걸 싫어해서 가는 곳마다 다른 가명(假名)들을 씁니다. 그리고 소설에 나오는 (안 보고도 패를 읽는다는 등의) 타짜 고수들의 전설은 그저 ‘전설’일 뿐이에요. 사기도박은 ‘짜고 치는’ 것이기 때문에 ‘호구 잡는 판’을 꾸려도 서로 모르는 척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기 바쁘죠.”         마약 前科者에서 巫堂까지    장병윤씨가 감수를 맡은 영화 〈타짜〉와 드라마 〈올인〉의 한 장면. 장씨는 “영화에서는 (아귀·짝귀 등) 별명을 갖고 다니는데, 실제 타짜들은 알려지는 걸 싫어해서 가는 곳마다 다른 假名들을 쓴다”며 “소설에 나오는 타짜에 관한 전설 같은 이야기는 그저 ‘전설’일 뿐이다. 사기도박은 기본적으로 ‘짜고 치는’ 것”이라고 했다. 사진=조선DB  아파트·부둣가의 화투판을 쓸었고, 중국계 미국인 친구와 함께 미군 부대에서 흑인들과 ‘블랙잭’(딜러와 플레이어가 두 장 이상의 카드를 합한 점수로 대결하는 도박)을 치기도 했다. 밀수꾼에게 ‘공사’를 쳐 판돈으로 명품시계를 뺏기도 했다. 저녁이면 현금 뭉치에 시계·반지, 금 20돈짜리 라이터까지 쓸어 담았다. 한 재벌가의 망나니 아들이 하는 도박판에도 초대받았다. 영화처럼 ‘해머’와 ‘작두’가 등장하지는 않아도, 화투를 치다 싸움판이 벌어지면 으레 주먹질을 하고 맥주병을 깨서 싸웠다. 두려운 게 없었다. 손기술 하나로 세상이 내 것 같았다. 한 판만 털어도 수천만원씩 떼돈을 버니 자연스레 ‘딴생각’이 들었다. 버젓이 가정을 둔 채, 매춘부를 두셋씩 끼고 침대 위를 뒹굴었다. 고액의 팁을 던져주는 건 물론이었다.      주변의 꾐에 넘어가 마약에도 손댔다. 입속에 몇 톨을 넣으면 혀가 갈라지는 기분이 들고, 주삿바늘을 팔뚝에 꽂으면 눈앞에 해골이 ‘툭’ 하고 떨어지는 환각이 보였다. 약발이 떨어지면 사흘 밤낮을 자지도 먹지도 못했다. ‘중독’이었다. 73kg이던 몸무게는 60kg 아래로 떨어졌다. 심장이 1분에 180번 이상 뛰기도 했다. 늘 아래윗니를 악다물고,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신물을 뱉는 습관도 생겼다. 입안은 멍울이 불거져 이쑤시개로 계속 터트려야 했다. 도박을 그만두고 싶어도 마약 살 돈이 없어 화투판을 기웃거렸다. 가정을 소홀히 한 탓에 딸아이가 집에서 손을 다쳐 성인이 다 된 지금까지도 불편을 겪게 됐고, 어린 아들 하나는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그렇게 ‘청춘 10년’을 허송세월한 그에게 남은 것은 파괴된 가정과 ‘전과 9범’이라는 주홍글씨였다. 눈앞에 자꾸 마귀가 보였다. ‘점쟁이 하면 봐줄게’ 하는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괴로운 마음에 결국 지리산 무당을 찾아가 신내림을 받았다. 점을 보러 온 할머니들의 직업과 생애를 차례로 맞히는 신기(神氣)까지 보였다. 그 뒤로 점집을 차려 무당 노릇을 몇 달간 했다. 33세 되던 해였다.      “언젠가 신(神)을 받으려고 쌀더미에 대[竹]를 꽂으니까 지옥의 불구덩이가 보이더군요. 돌아가신 아버지도 보였습니다. ‘이 굿판을 모두 부수라’고 하면서 부디 자수해서 감옥에 갔다 오라고 하셨습니다. 살아서 수십 번 감옥에 갔다 와도 괜찮으니 제발 이 짓을 그만하라고….”         “自殺 직전까지 간 사람들 찾아와”      34세 되던 해, 기독교에 귀의한 장씨는 20여 년간의 긴 방랑 생활을 정리했다. 타짜로서 달고 살던 술·도박·마약을 끊고 고향 산청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십수 년간 고물·퇴비·소금 장사를 하다가 식당·휴게소를 차리기도 했다. 어탕(魚湯)국수와 오리고기 요리를 개발해 빚도 갚아 나갔다. IMF 위기에 집이 경매로 넘어가는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못다 한 만화가의 꿈을 인기 웹툰작가로 성공한 장남(필명 ‘장이’)이 이뤄주면서 재기의 발판이 마련됐다.      언론 매체들도 장씨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 그의 삶을 다룬 만화 〈타짜〉가 신문에 연재되었다. 장씨는 도박 방지를 위한 인터넷 사이트 ‘노타짜’를 개설해 사기도박 기술을 세상에 폭로했다. 이에 반발한 현역 도박사들이 공개적으로 위협하기까지 했다. 2003년 장씨가 감수로 참여한 SBS 드라마 〈올인〉과 몇 해 뒤 관련 영화가 흥행하면서 신문·잡지·방송 등에 그의 일대기가 실렸다. ‘바다이야기’ 사태가 터질 때도 그의 얘기를 들으러 기자들이 산청으로 내려왔다. ‘역효과’도 났다. 손기술을 배우러 오겠다는 사람들이 장씨 집 앞 대문에 모여들었다. 한 사람은 사기도박을 폭로한 그의 책을 읽고 되레 ‘타짜’가 돼 도박판에 뛰어들었다.      “지금도 가끔씩 ‘기술 좀 알려달라’고 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초창기 때는 몇백 명이 다녀갔죠. ‘막판’에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집 날리고 땅 날리고, 차비만 겨우 마련해서 오는 거예요. 완전히 자살 직전까지 간 사람들인 겁니다. 한 아주머니가 자기 남편의 도박 중독 좀 고쳐달라고 통사정을 해서, 그 집을 직접 찾아간 적도 있어요. 그때 제가 ‘사기도박은 절대 이길 수 없다’면서 그 남편 앞에서 ‘원하는 패를 원하는 시점에 줬다 뺏는 기술’을 보여줬죠. 한 일주일 지나니까 그 부부가 떡을 한 보따리 갖고 우리 가게로 와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더라고요. 그 뒤로 ‘남편이 도박을 끊었다’고요. 그전까지는 본인이 운이 없는 줄로만 알았겠죠. 그들 손아귀에서 운이 만들어지는 줄은 모르고….”         “일반인 ‘타짜 감별’ 못 해… 사기도박에 반드시 걸려”      장씨는 개인 사업 외에 교회·병영·경찰대학 등에서 수십 차례 강연을 하기도 했다. 연단에 오를 때마다 자신의 사례를 토대로 ‘도박·마약 중독에 걸리지 않도록’ 청중을 설득했다. 그는 앞으로 도서 출판과 영화 제작 등으로 도박·마약 중독의 위험성을 사회에 알리는 데 힘쓰겠다고 했다. 어느덧 예순 중반이 된 ‘원조 타짜’가 경험한 도박의 세계는 어떤 곳이었을까.      “일반인들이 처음 도박에 빠질 때는 자기가 운이 있는 줄 알아요. 타짜들요? 절대로 감별 못 합니다. 선수들끼리만 알죠. ‘사기도박’에 반드시 걸리게 돼 있는 거예요. 그럼 타짜는 좋으냐? 그 말로(末路)가 어떤지 아십니까? 한 사람은 낚시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고, 함양에 살던 모씨(某氏)는 암에 걸려서 고생하다 갔어요. 다른 이들은 전부 가족이 미치는 등 집안에 우환이 생겼고요. 타짜 해서 번 돈으로 다른 사업 하면 쫄딱 망해버리고요. 저는 사람이 죽어도 끝이 아니라고 믿어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만 가지고 하늘나라 가는 거예요. 나쁜 짓을 하면 하늘에 코가 딱 걸립니다. 많은 사람한테 나쁜 짓을 했는데, 하늘이 그걸 풀어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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