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 보면 죽는 그림이 있다고?…악몽을 그린 화가 벡신스키
◆세 번 보면 죽는 그림
괴담의 힘은 무시무시하다. 실체도 없고, 출처도 불분명하지만 무서운 소문은 들불처럼 퍼진다. 한때 일본과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에 '이 그림을 세 번 본 사람은 죽습니다'란 게시물이 떠돌았다. 기어이 죽음을 무릅쓰고 게시물을 클릭한 사람은 기이한 그림을 마주했다.
황량하고 음산한 땅에 의자 하나가 있다. 의자 등받이는 거울로 돼 있다. 거울 앞엔 밀가루처럼 새하얀 여자 얼굴이 놓여 있다. 여자의 목은 흰 레이스로 장식돼 있다. 누군가가 여성의 목을 뎅강 잘라 장식품처럼 의자에 올려놓은 모양새다. 여자는 눈을 크게 뜨고 있다. 퀭한 눈동자는 허공을 응시한다. 행여나 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칠까 겁난다. 이 그림을 세 번 봐도 죽지 않으리란 건 모두가 안다. 하지만 왜 이런 괴담이 붙었는지 납득 가능한 무서운 그림이다. 몇 가지 의문이 든다. 누가 이 그림을 그렸는가.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그림에 담긴 메시지는 무엇인가. 제목이라도 있으면 가늠해보겠지만 이 그림에는 제목도 없다.
무제(1985). `3번 보면 죽는 그림`으로 유명한 벡신스키 작품. / Beksinski foundation
◆악몽을 닮은 그림들
'세 번 보면 죽는 그림'을 그린 인물은 폴란드 화가 즈지스와프 벡신스키다. 국내에 널리 알려진 화가는 아니지만, 전 세계적으론 적지 않은 추종자를 거느린 예술가다. 벡신스키는 환시미술 장르를 개척한 화가다. 환시미술이란 존재하지 않는 풍경이나 피사체를 실제로 눈앞에 있다고 여기며 그린 그림을 말한다. 쉽게 말해 환상을 그린 그림이다. 벡신스키가 그린 환상은 온통 악몽이다. 그의 다른 그림도 괴담에 동원된 작품 못지않게 섬뜩하다. 절망적인 이미지가 말초신경을 때린다.
벡신스키 그림에는 제목이 없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되길 꺼렸다. 그래서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무엇이 당신의 작품에 영향을 끼쳤습니까?'란 질문에도 벡신스키는 "없다"라고 답했다. 인간에게는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 화가가 작품에 대해 일절 설명하지 않을수록 궁금증은 커진다.
벡신스키처럼 집요하게 절망과 공포를 그린 유명한 화가가 있었다. 그는 뭉크다. 뭉크 대표작 '절규'에서는 절망과 공포가 찌릿찌릿 느껴진다. 뭉크는 태어난 지 5년 만에 병으로 어머니를 잃었다. 어머니 대신 자신을 보살폈던 누나마저 곧 결핵으로 떠났다. 태생적으로 병약했던 뭉크는 어머니와 누나처럼 자신에게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오리라는 공포에 시달렸다. 불안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래서 뭉크의 그림은 어둡다. 예술가의 삶과 작품은 떼어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악몽을 그린 벡신스키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무제(1976) / Beksinski foundation
◆대학살 시대 폴란드에서 성장한 화가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영화는 많다. 이 영화들은 크게 두 가지 소재로 나뉜다. 독일에 맞서 연합군이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지 묘사하거나, 나치가 저지른 만행을 고발하는 식이다. 후자를 대표하는 영화는 '쉰들러 리스트'다. 주인공은 독일인 사업가 쉰들러다. 2차 대전 중 독일은 폴란드를 점령했다. 쉰들러는 나치와 손잡고 폴란드로 향한다. 나치는 포로가 된 유대인을 쉰들러에게 제공한다. 쉰들러는 임금을 줄 필요가 없는 유대인을 데려와 자신의 공장에서 일을 시킨다. 쉰들러는 어느 날 유대인을 상대로 나치가 벌이는 살육을 목격한다. 자신과 함께 일하는 유대인과 교류하며 양심의 가책을 느낀 쉰들러는 유대인 구출 작전을 세운다.
'쉰들러 리스트'처럼 나치의 잔인함을 다룬 영화엔 유대인 수용소가 등장한다. 독일군은 유럽 곳곳에 수용소를 세웠고, 그곳에서 유대인을 소각했다. 가장 규모가 큰 수용소는 아우슈비츠였다. 흔히 아우슈비츠는 유대인 수용소를 일컫는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엄밀히 따지면 틀리다.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도시 '오시비엥침'의 독일식 이름이다. 독일군은 전쟁 중 유대인을 600만명 학살했다. 이 중 100만명이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 도시 하나를 도살장으로 내어 줘야 했던 폴란드는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린 나라다. 이 전쟁 자체가 독일이 폴란드를 공습하며 발생한 비극이었다.
벡신스키는 아우슈비츠라는 살인 공장이 쉼 없이 가동하던 시기에 폴란드에서 성장했다. 그는 1929년 폴란드 남부 도시 사노크에서 태어났다. 벡신스키가 10세 때 2차 세계대전이 발생했다. 전쟁 전만 해도 벡신스키가 태어난 도시 사노크에는 꽤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들 대부분은 사라졌다. 사노크 근처에도 유대인 수용소가 있었다. 그곳에서 벡신스키 이웃이었던 유대인들이 살해당했다. 생지옥에서 덜덜 떨며 성장한 소년은 너무 많은 죽음과 폐허를 목격했다. 벡신스키는 전쟁이 끝난 뒤 대학에 들어가 건축을 전공했다. 졸업 후 그는 조국을 재건하는 업무를 맡았다. 몇 년간 건설현장 감독관 일을 했다. 벡신스키는 이 일을 지루해했고, 결국 예술 세계로 뛰어들었다.
그는 카메라를 들었다. 명암 대비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흑백 사진을 찍었다.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전위적인 사진을 생산했다. 이때부터 그의 작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길한 기운이 어른거렸다. 벡신스키는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를 구현하기에 사진이라는 장르가 제약이 많다고 느꼈다. 1960년대 들어 그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으로 스케치 연습을 했다. 그렇게 지옥문이 열렸다.
무제(1973) / Beksinski foundation
◆"내 그림을 이해하려 들지 마세요"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어떤 상징도, 서사도 떠올리지 않습니다. 내 그림에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내 그림을 이해하려 들지 마세요." 벡신스키는 은둔을 자처했다. 다른 예술 작품에서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을 까봐 미술관에도 가지 않았다. 화실에 틀어박혀 고전 음악과 록 음악을 들으며 묵묵히 그림만 그렸다. 그는 그림을 본 관객이 이미지가 전달하는 느낌 그 자체만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길 원했다. 그 밖엔 모두 쓸모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의 그림 앞에서 그러기는 쉽지 않다. 벡신스키 그림을 보면 본능적으로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서사가 물밀 듯이 떠오른다. '핵전쟁 이후 폐허가 된 지구가 이런 모습일까' '지옥이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그의 작품은 두 가지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의 신체는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왜곡됐다. 살과 뼈가 분리된 건 기본이다. 차마 인간이라고 보기 힘든 형상을 한 생물체가 바퀴벌레처럼 땅을 기어 다닌다. 두 번째 특징은 어떤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황폐한 배경이다. 꿈속에서조차 발을 디딜까 두려운 절멸의 땅이다.
벡신스키는 대학살 시대의 한복판에서 성장했다. 인간 목숨값은 소각장으로 향하는 컨베이어벨트에 놓인 쓰레기 수준으로 추락했다. 이 시기에 소년은 무엇을 봤을까. 밤에는 어떤 꿈을 꿨을까. 벡신스키 그림은 피로 흠뻑 젖은 폴란드라는 땅이 토해낸 악몽처럼 느껴진다.
벡신스키는 꾸준히 질문받았다. '도대체 당신의 그림은 무엇인가!' 화가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굳이 내 그림 장르를 따지자면 고딕이나 바로크입니다." 기독교 문화에 뿌리를 둔 고딕, 바로크 화풍의 공통점은 숭고미다. 건축가 출신답게 벡신스키는 어딘가에서 실제로 본 풍경을 그리듯 지옥을 세밀하고 꼼꼼하게 묘사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엔 고딕 미술처럼 견고하고 웅장한 기운이 있다. 그가 쌓아 올린 지옥 풍경은 끔찍하면서도 장엄하다. 탐미적인 뉘앙스로 가득하다. 공포의 힘은 강하다. 사람들은 지옥을 두려워하면서도 지옥 풍경을 궁금해한다. '세 번 보면 죽는다'란 경고에도 게시물을 클릭하는 사람이 있듯, 공포에는 거부하기 어려운 압도적인 마력이 있다.
무제(1976) / Beksinski foundation
◆환상보다 무서운 현실
1970년대 벡신스키는 폴란드에서 유명한 화가가 됐다. 1980년대부터는 서유럽과 미국에도 이름을 알렸다. 전 세계 곳곳에서 초청받았지만 벡신스키는 폴란드를 떠나지 않았다. 자신의 전시회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을 정도로 세상과 소통하지 않았다.
벡신스키 DNA가 선명하게 전파된 곳은 영화계다. 스위스 출신 초현실주의 화가 H R 기거는 벡신스키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예술가다. 그는 할리우드 감독과 손잡고 주로 괴물 형상을 제작했다. 아카데미 시각효과상까지 거머쥔 거장이다. 그의 대표 작품이 '에이리언'이다. 괴생물체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역시 벡신스키에게 영감을 받았다. 일본에서만 4000만부 이상 팔린 만화책 '베르세르크'에도 벡신스키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1989년부터 현재까지 연재하고 있는 이 만화책은 암울한 세계관으로만 따지면 경쟁자가 없다. 몇몇 장면은 대놓고 벡신스키 그림을 베꼈다.
벡신스키의 말년은 비극이었다. 1998년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년 후엔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들 주검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벡신스키였다. 가족 두 명을 연달아 잃은 벡신스키는 더 깊은 고독 속으로 들어갔다. 2005년 75세였던 벡신스키는 살해 당했다. 지인의 아들이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했고, 벡신스키는 거절했다. 이 과정에서 다툼이 발생했다. 화가는 자신의 그림보다 더 무참한 방식으로 생을 마감했다.
벡신스키 그림은 분명히 두렵다. 하지만 그의 유년 시절을 지배했던 광기의 시대보다 더 두렵지는 않다. 벡신스키 그림은 섬뜩하지만 말년에 화가에게 찾아온 비극만큼은 아니다. 현실은 자주 악몽을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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