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한병이 5000원이라니.. 애주가들 뿔났다
[아무튼, 주말]
식당 소주값 인상.. 마트 3배 법칙 깨져
회사원 김모(53)씨는 최근 서울 광화문 단골 식당 여러 곳에 발길을 뚝 끊었다. 소주 값을 4000원에서 5000원으로 올린 죄를 물어 '살생부'에 올렸다. 애주가로서 소주 한 병에 5000원은 용납할 수 없는 가격이라고 했다. 그는 "다들 맛집으로 소문나 점심에 줄을 서서 먹는 식당이라 더 화가 난다"며 "정나미가 떨어져 다시는 안 간다"고 말했다. '소확행'이 아니라 작지만 확실한 복수를 한 셈이다.
대형 마트에서 소주 한 병(360mL)은 1190원이다. 퇴계 이황(1000원권) 한 장 값에 가깝다. 하지만 이 소주가 일반 음식점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오는 순간 율곡 이이(5000원권)를 요구한다. 4.2배 차이다. 살림지식총서 '소주 이야기'를 쓴 이지형씨는 "소주는 1980년대 말에 출고량에서 막걸리를 제치고 제1의 '서민 술'로 자리 잡았다"며 "한 병에 5000원이면 스타벅스 커피 값보다 비싼데, 서민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엔 당혹스러운 가격 인상"이라고 말했다.
소주 값 5000원 시대
20년 전 식당에서 한 병에 2000원이면 불콰하게 취할 수 있었다. 소주 값은 21세기 들어 한동안 3000원을 유지하다 몇 년 전부터 4000원으로 뛰더니 급기야 5000원 시대가 열리고 있다. 한 병 추가하기 무섭다고들 한다. "이슬 주세요!" "처음요!" 외치려다 목구멍으로 삼키는 것이다. 이슬치고는 너무 비싼 거 아닌가? 처음처럼이라며 왜 값은 올려 받나? 반주권(飯酒權) 침해 아닌가?
NICE지니데이타가 2018년 1월부터 12월까지 전국 주류 취급 업소 4만3000곳의 소주 가격을 분석했다. 3~4년 전만 해도 3000원이던 소주 한 병이 대체로 4000~5000원, 일부 지역이나 고급 식당에선 6000~8000원에 팔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 평균값은 3930원이었다. 17시·도 중 서울(4063원)과 제주(4054원)가 비쌌다.
서울에서 소주 값이 가장 높은 지역은 4613원을 기록한 강남구였다. 서초구(4301원) 용산구(4272원)가 뒤를 이었다. 반면 도봉구(3744원) 강북구(3793원) 중랑구(3848원)는 저렴한 1~3위로 조사됐다. 전국에서 소주 값이 낮은 지역 1~3위는 경북 봉화(3092원) 전북 장수(3192원) 경북 영양(3275원)이었다.
마트와 식당 소주 가격을 단순히 비교하기는 어렵다. 음식점에서는 소주 원가 외에 기본 상차림, 인건비, 월세, 점포 운영 경비, 각종 비품의 감가상각비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품목별로 차이가 있지만 음식점 메뉴는 마트 가격의 3배인 경우가 많다. 마트에서 소주 가격이 1000원일 때 식당에서는 3000원을 받았다. 이 '3배수 법칙'이 깨진 것이다.
참이슬 출고가도 오른다
국세청이 주세(제조원가의 72%) 보전 등을 위해 주류 가격을 통제할 수 있는 '주류가격명령제'가 지난 1월 폐지됐다. 공장 출고가를 올릴 때 업체들의 부담이 가벼워졌다. 하이트진로는 다음 달부터 참이슬 출고가를 병당 65.5원(6.45%) 올린다고 24일 밝혔다. 1015.7원에서 1081.2원으로 바뀐다. 인상은 3년 5개월 만이다. 오비맥주가 최근에 카스 등 맥주 값을 5.3% 올리자마자 들려온 나쁜 소식이다.
맥주 업계 1위와 소주 업계 1위가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닌지 애주가들은 의심한다. 그들에겐 일종의 지진(地震)이다. 회사원 박모(45)씨는 "알코올에 물을 잔뜩 타면서 도수(度數)는 줄기차게 내리고 주정(酒精) 값은 대폭 절감했는데 왜 소주 가격은 말아 올리냐"며 "몇 달 뒤 일반 음식점 소주 가격에 어떤 쓰나미가 몰려올지 두렵다"고 말했다.
광화문 중식당 중화는 지난해 9월 소주 5000원, 맥주 6000원으로 값을 올렸다. "상승한 임대료와 인건비 등을 맞추느라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소호정은 작년 말부터 소주·맥주·막걸리 모두 5000원씩 받는다. 왕비집 시청무교점도 올 들어 소주 5000원이 됐다. 을지로 입구 충무집은 8년 전에 소주 가격을 4000원에서 5000원으로 올렸다. 부민옥도 지난 2월부터 5000원을 받는다. 이 식당 사장은 "최저임금과 임대료 상승에 대응하려니 음식 값보다 덜 민감한 소주 값에 반영했다"고 말했다.
반면 무교동 북엇국집은 소주 한 병이 3000원이다. 순두부를 파는 감촌, 설렁탕을 파는 풍년옥, 안동국시와 곰국시 등은 여전히 4000원을 받고 있다. 이태원 숯불구이도 같은 가격이다. 서린동 안동국시 사장은 "주류는 박리다매"라며 "도저히 못 버틸 때까진 올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병에 3000원을 받는 후암동 153어탕국수 사장은 "술장사는 아니지만 도매상 값이 자꾸 오르면 어떡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손님이 모이는 디테일'을 쓴 주시태 NICE지니데이타 상권분석서비스 팀장은 "인건비와 월세, 재료비 등이 오르는 상황에서 점주가 손님 수를 극적으로 늘릴 수 없다면 메뉴 값을 인상한다"며 "음식 값은 10%만 올려도 손님 수가 떨어지기 때문에 가격 저항이 덜한 주류 값으로 보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별 소주 가격 차이는 상권의 활성도(임차료)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데 역세권(상업지)이 가장 비싸고 직장가, 특수 상권(기차역이나 터미널), 대학가, 주거지 순이다.
1900~3000원 '착한 식당'도 있다
소주 가격은 평평한 운동장이 아니다. 점점 기울어지며 격차가 커진다. 값을 매기는 일은 여러 가지 문제와 얽혀 있고 당연히 식당 주인의 자유다.
주류 도매상은 일반 음식점에 소주 한 병당 1500~1600원, 맥주 1700~1800원에 납품한다. 유통 마진이 붙는다. 하지만 낙원동 유진식당과 합천돼지국밥처럼 손님에게 3000원만 받아도 밑지지 않는 장사다. 창신동 창신국밥 사장은 "(소주가 3000원이지만) 이익 좀 덜 보면 되지" 하며 웃었다.
서울 강남에는 예술의전당만 있는 게 아니다. 역삼동 '싼술의전당'에선 소주 한 병이 1900원이다. 이곳에서 회식을 추진한다는 총무들은 "술을 마실수록 돈을 아끼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도봉구 창동역 앞 '닭한마리'는 소주를 2000원만 받는다. 주인은 "포장마차를 하다 10년 전쯤 가게를 냈는데 단골들이 와 주셔서 포차 시절 술값을 유지하고 있다"며 "사실상 남는 게 없지만 소주만큼은 영원히 2000원"이라고 했다.
'가성비(가격 대비 효용)'와 '가심비(가격 대비 만족도)'가 있다. 40~50대 남성은 소주 3000~4000원을 받는 점포를 찾고, 20~30대는 가격 차이보다 인테리어(분위기)와 맛, 접근성에 끌린다. 주시태 팀장은 "가성비를 따지는 고객이 많으면 낮은 가격으로, 가심비를 중시하는 손님이 많으면 가격을 올리되 더 큰 만족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소주 값 5000원도 당장은 충격적이고 배신감이 들지만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고 적응할 수밖에 없을까. 회사원 이모(51)씨는 "메뉴판에서 소주 가격을 숨기는 곳도 있고 영수증에 찍혀 나오지도 않는다"며 "최근 소주 가격을 5000원 받길래 분노한 것 같은데 어느 식당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과음해서…"라고 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인 1인당 소주 소비량은 연간 87병이다. 지난 23일 창신동 서울식당에서 세 명이 제육볶음과 부대찌개를 안주로 소주 두 병을 나눠 마셨다. 소주 값은 3000원. 착했다. 소주가 '서민의 연료'라는 비유에 어울리는 가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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