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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요구하듯, 반성 않으면 내로남불" 베트남 삿갓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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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국가책임 묻는 첫 집회
"전쟁 폐해와 실상 누구보다 잘 아는 한국 역시 반성해야"
12살 "내 또래 학살당한 역사 슬퍼..정부가 진실 밝혀주길"

23일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베트남 민간인 학살, 이제는 국가의 책임을 묻습니다’ 문화제 참가자들이 청와대를 향해 선 채 “우리는 진실을 원합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베트남식 삿갓 ‘넌라’에 51년 전 학살당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23일 오후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 인도. 베트남식 삿갓을 일컫는 60개의 ‘넌라’가 나란히 놓였다. 넌라에는 반티논, 레티소, 응우옌티피, 응우옌꾸이, 까오티삭, 반쑤엔 등의 이름이 적혔다. 이들은 모두 1968년 베트남 하미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들이다. “이제 광장의 공간을 피해자에게 내어주고자 합니다. 한 번도 이 자리에 설 기회가 없었던 이들, 우리가 잊었던 이들, 대한민국이 기억하지 않았던 이들의 시간이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를 알리는 단체 ‘연꽃아래’ 신민주 대표가 이렇게 말하자, 40여명의 참가자는 비로소 광장에 선, 넌라 위의 이름들을 향해 묵념했다.

연꽃아래와 한베평화재단 등 16개 단체가 연 ‘베트남 민간인 학살, 이제는 국가의 책임을 묻습니다’ 문화제의 한 장면이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베트남에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묻는 첫 집회를 열고 △정부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 △정부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한 진상규명 시행 △베트남 퐁니 퐁넛 마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국가정보원의 조사 문서 공개 △모든 시중 교과서에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추가 등의 조처를 촉구했다. 시민들은 “우리는 진실을 원한다”, “민간인 학살 국가가 책임져라”, “국정원은 정보공개 신속히 시행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23일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베트남 민간인 학살, 이제는 국가의 책임을 묻습니다’ 문화제 참가자들이 바닥에 놓인 ‘넌라’에 쓰여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 이름을 향해 묵념하고 있다.

연꽃아래 등의 설명을 종합하면, 1964년부터 시작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꽝남성과 꽝응아이성, 빈딘성과 푸옌성, 카인호아성 등의 마을에서 9천명이 넘는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를 만들었다. 이 문제는 1999년 <한겨레21>을 통해 한국 사회에 공론화했고, 이후 시작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 20주년을 맞았다. 당시 <한겨레21> 기자로서 기사를 작성한 고경태 22세기미디어 대표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대한 태도를 보면 한국은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일본을 비난할 처지가 안 되는지도 모른다.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처럼 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사건이 처음 국내에 알려진 1999년 태어난 김나무 연꽃아래 운영위원은 “1999년 태어나 20살 청년이 됐지만 여전히 정부는 증거자료가 없다는 핑계로 민간인 학살 언급을 기피하고 있다. 역대 대통령들도 ‘유감이다’, ‘비극적이다’라는 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베트남 퐁니 퐁넛 마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조사 문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는 국정원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임재성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변호사는 “1968년 2월12일, 베트남 퐁니 퐁넛마을에서 청룡부대가 작전을 벌여 70명 넘는 민간인이 죽었다. 2016년 국정원에 해당 자료를 공개하라는 정보공개 청구를 했다”며 “지난해 7월 법원이 관련 문건을 공개하라고 판결했지만, 국정원은 여전히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공개 거부 논리로 ‘베트남 피해자들이 고소할 때 한국 정부의 대응 전략이 아직 없다’는 이유를 대고 있다. 피해자 관점의 논리는 없다”고 말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가 교육 과정에서 제대로 다뤄지고 있지 않다는 지적도 나왔다. 김진영 연꽃아래 활동가는 “2016년 국정교과서 6종 가운데 5종이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언급했지만, 학생들은 (베트남 전쟁을) 경제 발전에 도움된 전쟁으로 배우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미국은 교과서에 미라이 학살(1968년 미군이 베트남서 자행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 등 미국의 과오도 다룬다. 학생들은 한국의 과오와 문제도 함께 알고 싶다”고 말했다. 김민채(13)양도 자유 발언을 통해 “학교에서 한국의 발전만 배우는 게 아니라 아픈 역사도 함께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23일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베트남 민간인 학살, 이제는 국가의 책임을 묻습니다’ 문화제 참가자 중 한명이 ‘베트남 국민들에게 사과해요. 우리가 사과해요’라고 쓴팻말을 들고 있다.

참가자들은 한목소리로 정부의 적극적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윤주호(12)군은 “친구들과 베트남 민간인 학살에 관해 토론하면서 우리 나잇대 또래들이 학살당한 걸 보고 정말 슬펐다”며 “정부가 피해자 유족들에게 사과해야 하며 진실을 먼저 밝히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혜정(35)씨는 “정부의 투명한 인정이 필요하다. 한국 사람만큼 전쟁의 폐해와 실상을 잘 아는 사람이 있는가. 일본에 요구하는 것과 달리 베트남에 대해서만 아무런 반성하지 않는 건 내로남불”이라고 말했다.

한편, 문화제가 진행되는 동안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은 일부 노인들이 발언자와 참석자에게 손가락질하거나 경찰에 항의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지우(20)씨는 “집회할 때마다 해병대 모자 쓴 분들이 한 마디씩 한다. 당신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분들도 국가 폭력에 동원된 피해자라는 말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글·사진 전광준 기자 ligh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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