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 벤치서 쓸쓸한 죽음..'마지막 길'을 함께했다
'무연고 사망자' 공영장례, 함께해보니..'죽음권'의 이유, 사느라 참 고생한 것만으로도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들 심정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보이지 않던,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뭐든 직접 해보니 다르더군요. 그래서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하나로 합쳐 봤습니다. 사서 고생한단 마음으로 현장 곳곳을 몸소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의 진실을 알리겠습니다. 소외된 곳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전남 완도가 고향인 이영호씨는 머나먼 서울에서 홀로 죽음을 맞았다. 사인은 '추락사'라 했다. 누구도 챙겨줄 이 없는 죽음이었다.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다. /사진=남형도 기자흰 국화꽃 한 송이를 들었다. 하얗고 기다란 꽃잎이 손길에 살며시 흔들렸다. 한 손으로 꽃줄기를 잡고 제대 위에 올렸다. 불그스름한 대추와 따듯한 촛불 사이, 그 중간 즈음이었다. 꽃은 바깥으로, 꽃줄기는 안쪽으로 향하게 뒀다. 넋이나마 꽃 한송이 받아들 수 있도록. 제삿상 가운데엔 고인(故人)의 이름 석 자가 적힌 위패가 있었다. 고(故) 윤진열, 그리고 고(故) 김금열. 그걸 바라보다, 눈을 감고 잠시 고갤 숙였다. 그 삶이 어떠했든, 마지막 길은 평안하길 바랐다.
모르는 이의 장례식에 온 건 처음이었다. 얼굴이 어떤지, 무슨 일을 했는지, 좋아하는 게 뭔지 아무것도 몰랐다. 둘은 '무연고(無緣故) 사망자'였다. 죽은 뒤에도, 아무도 챙겨줄 이가 없단 의미다. 윤진열씨는 지난 9월30일, 노원구 한 공원 벤치서 숨졌다. 고시원에서 홀로 살았다고 했다. 김금열씨는 간세포암으로 동작구 한 병원서 사망했다. 둘은 서로 아무 관계도 없지만, 우연히도 1963년생 동갑내기라 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홀로인 외롭고 쓸쓸한 삶. 그 마지막 길을 함께해보고 싶었다. 무연고 사망자라 불리는 이들의 장례다. 예전엔 이들을 그냥 화장만 하는 정도였다가, 최근엔 장례를 치러줄 수 있게 제도가 생겼다. 이를 '공영 장례'라 부르고 있다. 서울시는 지난해 조례를 만들어 지원하고 있고, 다른 지자체들도 도입 중이다.
14일, 하루 동안 무연고 사망자들을 함께 떠나 보내봤다. 비영리단체인 나눔과나눔, 그리고 상조업체인 정담의전의 도움을 받았다.
옷장에 고이 모셔둔 검은색 정장을 꺼냈다. 정장 바지를 오랜만에 입었다. 검은 재킷을 걸치고, 검은 구두를 신었다. 처음 만날 고인에 대한 '예의'였다.
수능 날답게 '한파'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나오자마자 '코트를 입을 걸'하고 후회했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내려다보니, 이름 모를 풀들이 겨울 추위에 노랗게 변해 있었다. 장례식장을 향해서인지, 그런 별 것 아닌 풍경에도 어쩐지 마음이 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표정이 잔뜩 굳은 수험생과, 이를 토닥거리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거였다. 사랑하는 누군가 함께 한다는 건.
2시간 가까이 이동해, 경기도 안산에 있는 장례식장에 갔다. 장례식도 없는 터라, 입구서 직원이 "어떻게 오셨어요?"하고 물었다. 기자라고 밝힌 뒤, 명재익 정담의전 대표를 기다렸다. 텅 빈 장례식장 여러 곳에 둘러싸여 있으니, 더 스산했다.
잠시 뒤 하얀 운구차 한 대가 도착했다. 인상이 서글서글한 명 대표는 "늦어서 죄송하다"며 첫인사를 했다. 그와 함께 온 여성은 상조업체 공동 대표라 했다. 차도 막히고, 오는 길에 직원이 교통사고도 나서 늦었단다. 빡빡 깎은 그의 머리를 보며, '정수리가 많이 시리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뒤 명 대표가 차 트렁크 뒷문을 열었다. 거기엔 시신이 놓여 있었다. 숨진 무연고자인데, 서울 병원에 안치돼 있는 분을 데리고 왔단다. 시신은 비닐에 싸인 채, 허리춤이 벨트에 묶여 있었다. 추출물이 나올 수 있어 그렇게 한 거라 했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지금 무슨 냄새 안 나느냐"고 그가 반문했다. 그러고 보니 생전 처음 맡아보는, 오묘한 냄새가 주변 공기를 에워싸고 있었다.
명 대표는 내게 "장례식장 안내실에 올라가 있으라"고 했다. 자신이 어느 정도 작업을 한 뒤, 나를 부를테니 그때 내려오라는 거였다. "괜찮으니 같이 있겠다"고 했더니, 그는 "안 된다"며 한사코 말렸다. 궁금증 반, 걱정 반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안내실로 갔다.
한 40여분이 흐른 뒤, 명 대표에게 "내려오라"고 전화가 왔다.
그리고 입관실에서, 숨진 무연고자와 처음 마주했다. 얼굴을 봤다가,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낯빛은 검붉었고, 코 오른쪽엔 상처가 있었다. 머리가 검길래 "젊은 것 같다"고 하자, 명 대표는 "1967년생, 53세"라고 했다. 그는 개나리색과 하늘색이 섞인 수의를 입고,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이름은 이영호라고 했다. 고향은 전남 완도이고, 서울로 올라와서 살았다. 지난달 13일, 사고로 숨졌다고 했다. '추락사'였다. 다리가 부러졌다고 했다. "그래서 아까 못 보게 한 것"이라고 명 대표가 설명했다.
어떤 삶을 살았는진 알 수 없었다. 다만 기초생활수급자라 했다. 고단했으리라, 그리 짐작했다. 아마 돈을 벌기 위해, 혹은 꿈을 위해 고향을 떠났으리라. 그리고 험한 삶을 살다가, 타지(他地)에서 이렇게 홀로 죽음을 맞았을 거라고. 고향엔 가족도 없다고 했다.
부러졌단 이영호씨의 다리를 두 손으로 잡았다. 감촉이 딱딱했다. 그리고 그의 명복을 빌었다. 사느라 조바심내지 않고, 무너질까 불안하지 않고, 매일 아등바등하지 않는 편안한 곳에서, 오랜만에 천천히 숨 쉬며 산책할 수 있기를.
무연고자의 시신은 대개 험하다고 했다. 명 대표는 "그래도 이 분은 시신이 깨끗한 편"이라고 했다. 이 정도면 상위 20%란다. 그러면서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엊그제 본 무연고 사망자라 했다.
사진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살은 이미 다 썩었고, 시신엔 구더기가 잔뜩 있었다. 이미 시신이 상한 채 발견되는 경우라 했다. 모텔이나 여관은 그나마 청소를 하니 빨리 찾는데, 고시원에 사는 이들은 냄새가 난 뒤에야 발견돼 그렇다고. 이런 분들은 힘들지 않냐고 묻자, "힘들죠. 근데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가 모셔야지"라는 여대표의 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직원들도 못 시키고, 대표 두 명이 입관을 늘 직접 한단다.
얼굴을 흰 천으로 한 번, 노란색 수의로 두 번 감쌌다. 이영호씨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의 앞에서 다시 한번 명복을 빌었다.
이제 입관할 차례였다. 두 대표는 머리와 발을, 나는 허리춤을 잡았다. 명 대표가 "한 손은 밑에 놓고, 다른 손은 위에 놓고 안으라"로 했다. '하나, 둘, 으쌰'하는 구령과 함께 이씨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양팔을 가운데로 감쌌다. 관 뚜껑을 닫고, 빨간색 천을 그 위에 올렸다. '고(故) 이영호'란 이름을 꽃들이 에워쌌다.
마지막으로 하얀색 실크천 하나를 더 덮었다. 거기엔 '극락왕생(極樂往生: 죽은 뒤 극락정토에서 다시 태어남)'이라 쓰여 있었다. 관은 고이 들어 안치실로 옮겼다. 그는 다음날, 장례를 치르고 화장이 될 예정이었다.
무연고 사망자의 다음 여정이 궁금했다. 서울시립승화원으로 갔다. 벽제 화장터라 불리는 곳이다. 이곳의 늦가을도 코끝이 시릴 만큼 완연했다. 색깔이 짙어질대로 짙어진 낙엽이 발 언저리에서 바스락거렸다. 잎이 푸르러지면, 이윽고 바스러지는 게 자연의 섭리였다. 삶과 죽음은 그리 맞닿아 있음이, 여기 오니 새삼 느껴졌다.
승화원 앞에 있으니 잠시 뒤 운구차 한 대가 왔다. 명 대표가 내렸다. 뒷문을 여니 관 2개가 놓여 있었다. 이승에서의 긴긴 삶을 뒤로하고 이제 먼 길을 떠나는, 또 다른 무연고자 2명이었다.
누구냐고 묻고 싶은 걸 미뤄두고, 관을 먼저 들었다. 남자 4명이 달라붙었다. '영차' 하는 소리와 함께, 바퀴가 있는 운구 운반 카트에 옮겨 실었다. "아이고, 무겁네"라고 한 명이 웃으며 얘기하자, 또 다른 이가 따라 웃었다. 묵직했을 삶의 무게 탓일지. 관이 움직이는 동안, 대한불교조계종 자원봉사단 회원들이 염불을 외웠다. 누군가 관 위에 국화꽃 한 송이를 뒀다. 추모한다는 뜻이었다.
관을 매만지며 이름 모를 그에게, 속으로 말을 건넸다. '남형도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홀로 떠나지 않아 다행입니다. 그리고, 이 길에 함께해서 영광입니다. 그동안 많이 고단하셨지요. 이젠 편히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1번과 2번, 화장로 두 곳에 관이 들어갔다. 유리창 너머로 이를 지켜봤다. 그 앞엔 이름이 적힌, 위패가 각각 놓였다. 이젠 화장이 끝나길 기다릴 시간이었다. 통상 1시간 넘게 소요된다고 했다.
그제야 무연고 사망자들의 장례를 돕는, 박진옥 나눔과나눔 이사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어떤 사연이고, 왜 무연고 사망자가 됐느냐고.
고인의 이름은 윤진열씨와 김금열씨. 둘 다 57세 동갑내기라 했다. 두 사람 모두 연고자가 있었다. 가족이 당연히 없으리라 여겼는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추가로 이것저것을 더 물었다.
김씨는 형제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시신 인수를 포기했다. 윤씨는 형과 누나가 있단다. 그의 주소지로 시신 인수를 묻는 우편물을 보냈지만, 아무런 답이 없었단다. 그래서 두 사람은 '무연고 사망자'가 됐다.
가족이 없는 이만 '무연고자'가 아녔다. 한 명당 평균 장례 비용이 300만원, 죽음조차 부담으로 여겨야 했을, 누군가 감내할 삶의 무게를 생각지 못했다. 삶을 위해 죽음을 외면하는 이의 심정은 어떨지 헤아려봤다. 박 이사는 "무연고 사망자 대부분이 가족이 있어도 시신 인수를 포기하는 경우"라며 "비싼 장례비용을 감당하지 못해서"라고 설명했다. 어려운 이들의 가족도, 대부분 어려운 이들이 많다고 했다.
화장이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2층 빈소엔 제사상이 마련됐다. 마지막 떠나는 이들에게 술 한 잔 대접하고, 이들을 추모하는 자리였다.
빈소에 들어가니, 조계종 봉사단 회원 10여명이 있었다. 자그마한 공간이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방바닥은 따듯했다. 발바닥에 닿은 온기가 마음에도 전해져왔다. 제사상엔 대추, 밤, 감, 배, 사과 등이 놓였다. 이날은 약식이고, 원래는 밥과 음식까지 다 올린다고 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청아하고 묵직한 목탁 소리와 함께, 불교식 추모 의식이 진행됐다. 고인을 간단히 소개한 뒤, 향을 피웠다. 그리고 떠나는 이를 위한 마지막 술 한 잔이 채워졌다. '쪼르르륵'하는 소리가 조용한 방안을 메웠다.
추모하는 글 낭독을 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외롭고 힘들었을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영원히 가시는 길 아쉬워 이렇게 술 한 잔 올려드리겠습니다. 안타깝기 그지없으나 고이 길 떠나소서." 그리고 제배를 했다.
이어 조사(弔辭: 죽은 사람을 기리는 말) 낭독을 했다. 마음이 저렸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혼자인 무연고 사망자의 외로움을 바라보며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죽음마저 걱정이 되어버린 우리네 삶을 바라봅니다. 우리 주위엔 '잘 지내니?', '안녕?'이란 안부 인사조차 그리워 할 이들이 많았습니다. 가슴이 아려집니다."
염불까지 마치니, 1시간 정도의 추모 의식이 모두 끝났다. 박 이사는 회원들에게, 내게 음료 하나씩 건넸다. 고생했다는 의미였다. 그러면서 "아침 일찍 와서 함께 해주셔서, 동갑내기 두 분을 잘 보내드릴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내려와 화장로 앞에 섰다. 조금 있으면 화장이 끝날 참이었다.
기다리며 박 이사와 얘길 나눴다. 그는 2015년엔 장례식장을 돌아다니며 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를 했다고 했다. 2016년 2월, 서울시립승화원에서 처음 장례를 치렀다.
그때 기억을 잊지 못한다 했다. 그땐 '분골(유골을 부수는 것)'을 하지 않고, 유골함에 유골을 다 담을 때였다. 박 이사가 유골함을 받아 들었는데, 무척 따뜻했다. 그는 "죽은 사람이고, 플라스틱 유골함이라 차가울 거라 생각했다"고 했다. 따스한 온기가, 마지막 가는 이의 느낌 같았다고, 그래서 그걸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두 동갑내기의 화장이 끝났다. 화장로에 드리운 발이 올라갔다. 하얀빛 가루와, 아직 채 가루가 되지 못한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걸 마저 부수어 분골을 했다. 57년 기나긴 생(生)이, 한 줌의 하얀 가루가 됐다. 그게 다시 유골함에 담겨 바깥으로 나왔다.
거기에 손을 살며시 댔다. 박 이사의 말대로 따뜻했다. 삶이 마치 추운 겨울 같았던 이가, 마지막으로 내뿜는 따스한 입김 같았다. 그 정도의 온도였다.
멀리 어딘가에서, 한 유족의 한스런 울음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그 울음조차 사랑받은 삶이란 걸, 새삼 알았다. 이들에겐 울어줄 이도, 함께할 이도 아무도 없었다. 아니, 그럴 뻔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유골함을 드는 이도, 위패를 드는 이도, 이들을 뒤따르는 이도 있었다. 생애 내내 혼자였을지라도, 지금은 혼자가 아녔다.
유골함에 든 유골은 '유택동산'에 뿌린다 했다. 화장한 유골을 뿌리는 장소다. 이제 고인의 진짜 마지막 길이었다.
고인의 영정과 유골함과 위패를 올려놓고, 향 하나를 피웠다. 국화꽃 꽃잎을 하나씩 따서, 그 위에 흩날리듯 뿌렸다.
그리고 유골함에 든 유골을 꺼내, 돌로 만든 큰 유골함에 천천히 뿌렸다. 그리고 이름이 쓰여진 봉투 두 개를 태웠다. 이어 창호지에 싼 5만원을 함께 태웠다. 그게 뭐냐고 이미 물어봤었다. 박 이사가 대답해줬다. 저승에 갈 때, 노잣돈을 하라고 함께 태우는 거라고. 그걸 '지전'이라 부른다 했다.
마지막으로 명복을 비는 묵념을 했다. 옆에선 염불 소리가 들렸고, 천주교 신자인 난 성호경을 그으며 속으로 기도를 했다. "그의 마지막 길에, 이리도 많은 이들의 마음이 담겼으니, 어떤 삶을 살았든 간에, 때론 부족했고 때론 실수했건 간에, 치열한 생을 잘 마쳤으니, 부디 좋은 곳으로 가게 해달라고."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여느 때처럼 지하철을 탔다. 몸은 천근만근, 눈꺼풀도 무거워졌다. 지하철 손잡이에 머리를 기대고, 멍하니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건너편에 앉은 젊은 여성은, 부지런히 얼굴 화장을 했다. 눈썹을 그리고, 볼 터치를 하고, 입술을 바르고. 그 옆에 앉은 청년은, 무슨 공부를 하는지 책을 엄청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 옆에 앉은 할머니는 돋보기를 쓰고, 딸에게 서툰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날이 추어젔다. 건강 챙겨라.' 잠시 뒤엔 이동 노점상 아주머니가 와서, 목청 높여 허리 벨트를 팔고 있었다. 그는 자그마한 손수레 하나에, 삶을 기대고 있었다.
퇴근길 지하철은 시루떡이 됐고, 사람과 사람이 엉겨 붙었다. 고단한 하루를 보낸 이들은, 몸 하나를 지탱하느라 또 다른 전투를 벌였다. 누군들 편히 택시를 타고 싶지 않겠는가. 워킹맘은 한 손으로 손잡이를 붙들고, 그 와중에 "수아, 저녁 챙겨 먹였어?"하고 아이 안부를 물었다. 그리 하루가 저무는 순간까지 고군분투했다.
삶이 이렇듯 치열하다. 시신이 한 줌의 가루가 되는 걸 본 뒤, 다 덧없다고, 허무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리 사느라, 아니 살아내느라, 오래도록 고생한 것만으로도, 죽음은 고귀해야 한다고. 존중받아야 한다고, 대우를 해줘야 한다고. 똑같은 모습으로 왔지만, 삶의 명암은 누구에게나 같진 않아서 말도 안 되는 부침을 겪더라도, 그 마지막 길만큼은 위로를 받을 만큼 따뜻했으면 좋겠다고. 그게 삶을 버텨낸, 존엄한 이들을 위한 권리라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단다. 죽은 사람이 무슨 대수냐고, 산 사람이나 잘 살아야 한다고, 가족 있는 사람들을, 왜 국가가 나서서 세금 내가며 장례를 치러주냐고 말이다.
내가 겪은 상황으로 답을 대신하고 싶다. 추모하는 자리에서, 염불을 쉬지 않고 이어가는데, 호흡이 딸려서 혼났다. 양반 다리를 오래 하고 앉아 있으려니, 다리도 쥐가 날 것처럼 저렸다. 고인의 죽음을 위로하려 해도, 쉬이 집중이 안 됐다. 내 고통이 앞섰다. 조금 지나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따뜻한 밥 한 숟갈이 생각이 났다.
이렇게 미약하고 고통에 약한 삶인데, 어찌 살겠다고 피붙이의 죽음까지 외면하는 이들을 탓할 수 있을까. 그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 감히 짐작할 수 없는 난, 그리 생각하지 못할 것 같다. 그저 이렇게 얘기하고 싶다. 죽음은,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권리라고. 그건 누구나 최소한은, 지켜줘야 한다고. 비싼 솔송나무 관은 아니더라도, 수의(壽衣: 죽은 이에게 입히는 옷) 하나쯤은, 깨끗하고 구김이 없는 것으로 갖춰 입었으면 싶다고.
에필로그(epilogue).
장례가 끝나고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다 쓴 국화꽃을 쓰레기통에 버리다, 하얀 꽃잎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다른 건 꽃에 잘 붙어 있는데, 그 잎 딱 하나만 흙먼지에 뒹굴고 있었다. 가만히 두면 꽃잎은 누군가의 발에 짓이겨질 터였다.
국화 꽃잎 하나가 뭐라고, 마음이 쓰였다. 가까이 가서, 엄지와 검지로 조심스레 집었다. 그리고 다른 꽃잎처럼 쓰레기통에 고이 넣어주었다. 하얗고 긴 꽃잎 모양 그대로, 마지막까지 잘 지켜주고 싶었다.
홀로 떨어져 나갔더라도, 그 쓰임이 다 했더라도, 이젠 국화꽃이라 불리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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