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개봉한 홍콩영화 ‘중경삼림’에는 무빙워크에 올라 자신이 짝사랑하는 경찰관(양조위 분)의 집을 몰래 보는 여주인공(왕페이 분)이 등장한다. 혹시나 들킬까 낮은 자세로 기웃하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는데, 그가 올랐던 무빙워크는 홍콩에 오는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명소가 됐다.
정식 명칭이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인 이곳은 홍콩 정부가 센트럴 지역 주민의 이동 편의를 위해 1993년 개통한 엄연한 ‘교통 체계’다. 지상 입구에서 맨 끝 출구(해발 135m)까지 경사를 따라 800m에 걸쳐 설치됐으며, 총 23개의 이동장치(에스컬레이터 20개·무빙워크 3개)로 구성됐다.
◆계단 걷어내고 들어설 에스컬레이터… 노약자·어린이 불편 해소 예상
세계 최장 실외 에스컬레이터로 기네스북에 오른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처럼은 아니더라도 국내에도 최초 ‘동네 에스컬레이터’가 생긴다. 서울 서대문구가 지난달 29일 공도(公道)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는 계획을 밝힌 것이다. 서대문구는 주민 편의를 위해 신촌 명물길에서 신촌동 자치회관으로 이어지는 길목(연세로4길 42-7)에 있던 콘크리트 계단(40여층계)을 걷어내고 약 20m 길이의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키로 했다.
서울 서대문구가 신촌동 일대에 국내 최초 공도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한다. 원래 계단(사진 왼쪽 노란 동그라미)을 걷어낸 뒤, 들어설 에스컬레이터(사진 오른쪽)의 예상 모습. 서대문구 제공
서울시의 ‘신촌 도시재생사업비’ 7억6000여만원을 지원받아 지난달 착수한 공사는 내년 4월 중순에 끝난다. 지난 2월 사업계획을 수립한 서대문구는 전문가의 현장점검과 설계용역 등을 거쳐 8월 최종 에스컬레이터 설계도면을 완성했다. 구청 측은 “신촌동 자치회관과 함께 인근 신촌 문화발전소, 구립 창천노인복지센터 등 편의시설을 이용하는 시민들이 가파른 계단으로 큰 불편을 겪어왔다”며 “에스컬레이터가 가동되면 계단 오르내리는 노약자와 어린이들의 불편이 해소될 것”으로 내다봤다.
◆“계단 오르내리는 것보다 훨씬 편리” vs “계단 대신? 뜬금없다”
지난 4일 찾은 공사 현장은 계단 철거에 따라 드러난 흙으로 가득했다. 굴착기와 트럭들 사이로 작업자들이 바삐 오갔다. 원래 계단이 있었다면 진입 층계였을 맨 아래에는 계단이 전면 통제되므로 우회해달라는 안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별도로 세워진 공사 안내판에는 외국인들을 위해 영어·한자도 적혔다.
공사 현장 근처를 지나는 주민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파헤친 계단을 바라봤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설치되는 실외 에스컬레이터라는 설명에 신기해하는 반응을 보였다. 일부는 계단만 있어도 충분한 상황에서 굳이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할 이유를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했다.
최모(48)씨는 “노인복지센터와 자치회관이 있어서 평소에도 어르신들이 종종 오고 가신다”며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면 아무래도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보다는 편해 나이 드신 분들이 좋아할 것 같다”고 예상했다. 이모(45)씨도 “원래 있던 계단은 경사도가 심했다”며 “눈으로 길이 미끄러운 겨울철에는 낙상사고도 있었던 거로 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거동 불편하거나 자주 이곳을 다니시는 분들에게는 좋을 것 같다”고 에스컬레이터 설치를 반겼다.
반면, 양모(67)씨는 “세상에 계단 없는 동네가 어디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이곳만 유난을 떠는 것 아니냐”며 “결국 에스컬레이터 공사도 세금 들어가기는 마찬가지”라고 예산 낭비가 될 수도 있음을 걱정했다. 양씨는 “애먼 에스컬레이터 놓을 돈으로 서대문구의 어려운 사람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제공하는 게 낫다”며 에스컬레이터 설치로 이익을 얻을 일부가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한 것 아니겠냐고 추측했다. “계단 보수공사인 줄 알았는데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한다니 조금 뜬금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와 관련, 문석진 서대문구청장은 앞서 보도자료를 통해 “각종 문화·편의시설이 고지대에 위치한 경우, 시민의 편리한 방문을 위해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모노레일, 무빙워크 등의 이동편의시설 도입을 검토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