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갈등은 겨우 봉합했지만 의료체계 개편은 물건너 갈수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진료 현장의 의료공백도 해소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의사들의 집단행동 속에 의대 정원 확대, 공공의대 신설 등 현 정부가 야심 차게 추진해 온 의료체계 개편안의 전망은 불투명해졌다.
벌써부터 일각에선 의료체계 개편이 단순히 상당 기간 늦춰지는 것을 넘어 현 정부 임기 내에 재추진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와 맞물려 정책추진 '실패'에 따른 책임론이 불거질 소지도 있다.
특히 의사단체가 이번 합의를 기반으로 '의료수가' 인상 등 숙원 해결에 나설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의료소비자 측에선 정부와 의료계 양자 간의 협의체 구성 자체에 비판을 제기하고 있어 사회적 갈등이 증폭될 가능성도 있다.
정부·여당과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이날 쟁점 현안에 대한 협상을 각각 타결하면서 합의문에 "정책·법안 추진을 중단하고 코로나19 안정화 이후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재논의한다"고 명시했다.
또 보건복지부와 의협은 의료계가 철회를 요구하는 4대 정책(의대증원·공공의대·첩약급여화·비대면진료)은 물론이고 지역수가 등 지역의료지원책, 필수의료 육성책,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 구조개선, 의료전달체계계의 확립 등 다른 주요 현안까지 모두 의정협의체을 구성해 논의하기로 했다.
이 협의체는 건강보험 가입자와 환자, 시민사회, 학계 등 다른 이해관계자가 함께할 수 없는 자리다. 양자 간 협의에서 의협이 끝내 '정책 철회'만을 고수하면 논의가 공전할 수밖에 없다.
실제 최대집 의협 회장은 의사들에게 보낸 담화문에서 협의체의 성격에 대해 "의대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신설 추진을 강력하게 저지하는 효과를 얻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합의문 도출로 외견상 갈등이 봉합되긴 했지만, 복지부는 정책 추진 실패에 따른 책임론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이날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면서 이번 합의를 '새로운 시작'이라고 평가했지만, 당장 관련 시민단체에서는 '밀실거래'나 '백기투항'라는 단어까지 쓰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 176개 노동·시민사회단체는 공동 기자회견에서 "정부·여당과 의협이 공공의료 정책의 진퇴를 놓고 협상을 벌인 끝에 공공의료 개혁 포기를 선언했다"면서 "정부와 여당이 의사들의 환자 인질극에 결국 뒷걸음질을 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의당도 "매우 유감스럽다"면서 "국민의 생명·건강과 관련된 중차대한 국가적 의제를 이기적 집단행동 앞에서 물려버렸다"고 비판했다.
의대 (PG)
[장현경 제작] 일러스트
의료소비자 측에서는 의협이 건강보험 최고 의결기구인 건정심의 구조 개선을 언급한 데 대해서도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면서 정부의 강력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의사단체는 그동안 '건정심의 소통구조는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건정심 내 위원 몫을 늘리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내 왔다.
건정심은 의료공급자 8명, 가입자대표 8명, 정부와 학계 등 공익대표 8명 등 24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중 의협 몫은 2명이다. 향후 의협 지분이 늘어나게 되면 의료수가, 즉 건강보험이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에 지불하는 대가 결정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의료계는 2000년 의약분업 당시 파업을 거치면서 수가를 41.5% 인상하는 데 성공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의정협의체가 가동되더라도 의사 증원 등의 핵심 정책은 코로나19 상황이 안정된 이후에야 논의가 시작된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코로나19 사태는 최소한 내년까지도 이어질 것이라는 게 감염병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현 정부 임기 내에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은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복지부는 '백기 투항' 비판에 대해 "협의와 대화로 문제해결을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복지부는 또 의료계와의 실효성 있는 협의가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에는 "의료격차를 해소하고 의료전달체계를 개편하며 수련환경을 개선해 의료의 질을 향상한다는 방향에 의료계와 정부가 모두 공감하고 있어 합리적인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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