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메운 860억 적자···30살 맞은 '한컴' 아직 안 끝났다
“시커먼 컴퓨터 화면에 처음으로 로고가 떠오르던 날, 그날의 기쁨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글쎄, 조물주가 처음 천지를 창조한 기분이 이랬을까?”
이찬진(54) 포티스 대표가 자신의 책『소프트웨어의 세계로 오라』에서 쓴 한글 워드프로세서 ‘아래아 한글’개발 과정에 대한 묘사다.
서울대 기계공학과 84학번이었던 이 대표는 ‘서울대 컴퓨터 연구회(SCSC)’ 후배 김형집, 우원식 씨와 함께 1989년 4월 ‘아래아 한글1.0’을 만들었다. 당시 국내엔 영문 워드프로세서 ‘T-Master’를 한국어로 옮긴 ‘보석 글’(삼보컴퓨터)에서부터 ‘하나 워드’(금성 소프트웨어), ‘한글 2000’(한컴퓨터연구소)에 이르기까지 여러 워드프로세서가 있었지만, 아래아 한글은 출시 후 어떤 PC에서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범용성을 앞세워 시장을 빠르게 장악해 나갔다. 개당 4만7000원이었던 아래아 한글1.0을 팔아서 번 돈 5000만원으로 이 대표는 이듬해 한글과컴퓨터를 창업했다.
그 후로 30년. 글로벌 정보기술(IT) 공룡 마이크로소프트(MS)의 ‘MS오피스’가 워드를 포함한 전 세계 오피스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는 상황에서도 아래아 한글은 여전히 한글을 가장 잘 구현하는 토종 워드프로세서로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10일에는 최신 버전인 ‘한컴오피스 2020’을 출시하기도 했다.
중앙일보는 한글날을 앞둔 지난 2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에 있는 한글과컴퓨터 본사에서 오순영(42) 최고기술책임자(CTO)와 김만수(49) 미래기술연구본부장을 만나 오피스 소프트웨어 산업의 과거와 미래에 관해 물었다. 오 CTO는 한글과컴퓨터 최초 여성 CTO이며 김 본부장은 1995년 한글과컴퓨터에 입사해 24년간 한컴의 역사와 함께해 온 개발자다.
아래아 한글은 초기부터 쓰기 편한 프로그램을 지향했다. 당시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컴퓨터로 가장 많이 쓰는 기능은 워드였기 때문에 쉽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개발의 우선 고려사항이었다. 대표적인 게 ‘조합형 코드’를 채택한 점이다. 다른 워드프로세서는 한글 초·중·종성으로 조합 가능한 문자 1만1172자 중 2350자만 표현할 수 있는 완성형코드를 채택했다. 때문에 2350자에 포함되지 않은 ‘똠방각하’ ‘펩시콜라’와 같은 말은 쓸 수가 없었다. 아래아한글은 조합형코드를 채택해 쓸 수 있는 글자 수를 늘렸고, 정부에서 지정한 4888자보다 훨씬 많은 한자를 구현할 수 있게 했다.
김 본부장은 “보기에는 쉬워 보이지만 타이프라이터로 찍는 한 글자를 일일이 2진수로 대응해 디지털 세계에 똑같이 구현하는 것은 당시 기술로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며 “아래아 한글은 훈민정음 제정 당시 쓰이던 고어에서부터 방대한 한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글자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로 인기를 끌었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기술적 진보는 이어졌다. 도트 프린터에서 잉크젯 프린터, 레이저 프린터로 출력 매체가 바뀌고 도스에서 윈도로 운영체제가 바뀌면서 거기에 맞게 프로그램을 최적화시켜나갔다. 덕분에 ‘hwp’라는 확장자는 대표적 한글 문서파일 형식으로 자리매김했다. 1994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과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최신판인 ‘아래아 한글 2.5’를 선물 명단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윈도 운영체제에 최적화된 메가 히트작 ‘아래아 한글 97’의 시장 점유율은 당시 78%에 이를 정도였다.
하지만 불법복제가 만연했던 초기 한국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지속해서 수익을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정품 패키지에 들어간 프린터 연결 잭을 사용하지 않으면 출력을 못 하게 하는 등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하이텔 등 통신망에서 복사방지 코드를 깬 불법복제 버전이 비일비재하게 거래되면서 수익성은 악화했다. 김 본부장은 “100만원 넘게 돈을 주고 컴퓨터를 샀는데 또 소프트웨어까지 몇만 원씩 주고 사야 하냐는 인식이 당시 사회 지배적 분위기였다”고 설명했다.
결국 860억원에 달하는 누적적자를 감당하지 못한 한글과컴퓨터는 1998년 6월 아래아 한글 개발 포기를 선언했다. 개발 포기 조건으로 MS로부터 2000만 달러 투자를 받는다는 소식은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실의에 빠져 있던 국민 정서를 자극했다. 사회단체들이 모여 ‘한글지키기국민운동본부’를 세웠고 모금 운동이 벌어졌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민화 당시 벤처기업협회 회장 등의 주도로 투자가 이뤄지면서 MS와의 합의는 파기됐다.
한컴은 가까스로 회생한 이후에도 2000년대 초중반 닷컴 버블이 붕괴하는 등 불황이 겹치면서 우여곡절을 겪었고 프라임그룹 등에 소유권이 넘어갔다가 2010년 현재 회장인 김상철 회장이 인수하면서 안정을 찾았다.
회사는 모진 풍파를 겪었지만, 기술개발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래아한글 1.0’ 개발 때부터 이어져 온 ‘사용자가 쓰기 편한 프로그램’이라는 정체성은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기술개발의 기본 방향이 됐다. 2년에 한 번씩 중요한 업데이트가 이뤄지는 한컴오피스는 매번 첨단기술을 응용한 새로운 기능을 장착했다.
2011년에는 한글로 인쇄하면 점자책으로 만드는 기능이 들어갔다. 2018년 버전엔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챗봇' 기능이 들어갔다. 오순영 CTO는 “한컴오피스가 고도화되면서 기능만 5000~6000개에 달하는데 사용자가 이 기능을 찾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챗봇에 물어보면 이용자가 원하는 것을 찾아주는 서비스를 넣었다”고 말했다.
지난 10일 출시된 한컴오피스 2020에는 한국어와 영어로 작성된 문서 이미지 속 텍스트, 표, 그림을 분석해 hwp, docx, pptx 등 다양한 포맷의 문서로 변환해주는 ‘광학적 문자 판독장치(OCR)’기능이 들어갔다. 또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해당 문서가 진본인지 아닌지 판독하고 위조 여부, 수정 이력을 조사할 수 있는 기능도 추가했다.
오순영 CTO는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지난 30년간 해온 것처럼 언어와 문자를 디지털 환경에서 잘 구현하는 일이다. 앞으로도 오피스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AI, 클라우드, 챗봇 등 각종 기술을 발전시켜 이를 다른 분야에 응용해나가는 식의 확장 전략을 사용할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언어와 문자는 계속 쓸 것이고 이를 디지털 세상에서 구현하는 밑바탕은 워드프로세서를 포함한 오피스 프로그램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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