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이 살아났다
서울 여의도 전경련 건물 외경. 연합뉴스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는 경제민주화에 저항하고, 낡은 재벌체제를 옹호해온 재벌의 첨병(尖兵)이다. 전경련 해체는 모든 경제주체들이 함께 행복한 ‘정의로운 경제’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정의당 심상정 의원, 2016년 10월 16일 전경련 해산촉구 결의안 발표 회견) 당시 결의안에는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자유한국당(당시 새누리당)을 포함한 여야 국회의원 75명이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결의안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3년 뒤 2019년 9월 25일. 민주당 원내지도부를 포함한 의원 12명이 전경련을 찾아 간담회를 가졌다. 민주당이 전경련을 찾은 것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래 처음이다. 이 자리에서 민주당 의원들은 “민주당은 결코 반기업 정서를 갖고 있지 않다” “문재인 정부가 모든 대기업 노조의 편에서, 민주노총 편에서 일하는 게 절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해체’ 대상으로 전락했다가 ‘패싱’ 대상에 머물던 전경련의 위상은 이날 한 단계 올라섰다.
지난 3년의 가시밭길은 끝났나
전경련이 살아났다. 전경련 입장에서 지난 3년은 가시밭길이었다. 2016년 국정농단 세력과의 정경유착이 드러나 국회와 시민사회로부터 해체 요구에 시달렸고, 삼성과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4대 그룹을 시작으로 회원사들이 잇따라 전경련을 탈퇴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후보 시절 공식적으로 ‘전경련은 해체가 바람직하다’는 뜻을 밝혔다.
해체위기에 처한 전경련이 찾은 탈출구는 ‘셀프 개혁’이다. 한바탕 홍역을 치른 전경련은 대국민 사과로 2017년 새해를 시작했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신년사에서 “진심으로 사과 드린다. 국민의 엄중한 목소리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전경련은 이후 3월 정경유착 근절과 명칭 변경, 투명성 및 싱크탱크 강화 등을 담은 혁신안을 발표하며 환골탈태할 것을 선언했다. 허 회장은 “혁신은 말로만 그쳐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허 회장의 발언과는 달리 혁신안의 간판으로 내세운 명칭 변경(한국기업연합회)부터 이행되지 않았다. 정경유착 통로 역할을 했던 사회본부를 폐지하고 기존 7본부에서 1본부 2실 체제로 몸집을 줄였지만 정치권과 줄을 잇는 대관업무는 살려뒀다. 보수적 경제연구소 국가미래연구원의 김광두 원장(서강대 석좌교수)은 “회원·회비가 줄면서 인력이 빠져나가 몸집이 작아졌을 뿐 내부 혁신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며 “과거와 다르지 않은 전경련은 사라져야 할 조직”이라고 말했다.
전경련의 혁신 약속이 공약(空約)에 그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경련의 전신인 경제동우회와 한국경제협의회, 한국경제인협회 시절부터 정경유착은 전경련을 따라다니는 꼬리표였다. 1988년 전두환 일해재단 모금과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2002년 한나라당 차떼기까지 정경유착 비리는 끊이지 않았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정치자금이 필요한 정치권의 필요에 의해 되살아나길 반복했다. 이 때문에 정부 고위당직자들 사이에서도 전경련의 정경유착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혁신’이 아니라 ‘해체’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1998년 김태동 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은 “5대그룹 위주의 전경련은 해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9년 10월 전윤철 당시 공정거래위원장과 2000년 1월 이헌재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 역시 전경련의 해체 필요성을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전경련은 살아남았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전경련 사업보고서는 첫 장을 비롯해 상당 부분이 전경련 혁신안을 설명하는 데 할애됐다. 당시 해체 압박을 받고 있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2017년 보고서에 따르면 ‘싱크탱크’로 거듭난 ‘뉴 전경련’이 진행한 첫 번째 사업은 법인세 인상에 대한 반대의견서 제출이다. 전경련은 “법인세 인상이 불가함을 5가지 사실을 들어 조목조목 반박했다”며 “법인세율 인상으로는 세수 확대 등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고, 국제 추세 역행과 대표기업의 경쟁력 약화 등 부작용이 막대하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구성해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전경련은 국회 계류 중인 지배구조 규제 강화 상법 개정안의 부당함을 지적했다. 다중대표소송 도입과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임, 전자·서면투표 의무화, 인적분할시 자사주에 대한 규제가 기업 옥죄기라며 언론 홍보와 국회 건의를 통해 바로잡기 활동을 벌였다. 대기업집단의 지배력 확장을 막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대해서도 전문가 용역을 발주해 반대 명분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2017년 전경련의 싱크탱크 활동은 정부·여당의 개혁입법을 정조준했다. 하도급법과 대·중소기업 상생협력법 등 각종 개정안에 담긴 규제 역시 산업계에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며 반대의견을 냈다. 해를 넘겨서도 전경련은 정부의 경제민주화 정책과 법안을 반대하는 데 집중했다. 2018년 보고서에는 1순위 사업으로 기업 경영환경 개선이 올라왔다. 활동내역은 2017년과 다르지 않았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왼쪽)이 2017년 3월 24일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대국민사과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일 경제전쟁으로 재벌 필요성 강조
오히려 변화는 전경련이 아니라 정부·여당에서 먼저 시작됐다. 2018년 1월 10일 전경련은 평창올림픽조직위원회와 함께 올림픽 성공을 위한 후원기업 신년다짐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이낙연 국무총리는 경제계 인사들에게 올림픽 티켓 구매를 독려했다. 이 총리의 행보를 두고 재계에서는 올림픽 흥행 여부가 불투명해지자 전경련을 찾아 손을 내밀었다며 뒷말이 나왔다. 민주당의 변화는 정부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2018년 11월 민주당 동북아평화협력특별위원회는 기업인 100명 등이 포함된 대규모 방북단 모집에 협조해 달라는 공문을 전경련에 발송했다. 같은 달 민주당의 ‘경제를 공부하는 국회의원 모임(경국지모)’은 배상근 전경련 총괄전무를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다. 강연에서 배 전무는 기업의 대대적인 규제완화와 세제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2019년 3월에는 전경련 허창수 회장이 청와대에서 열린 필립 벨기에 국왕 만찬에 초대를 받았다. 이후 정부의 전경련 패싱이 끝났다는 전망이 나오자 청와대는 “전경련과 소통할 필요를 못느낀다”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전경련이 마련한 미세먼지 세미나에 조명래 환경부 장관이 참석하는 등 교류가 이어졌다.
전경련의 목소리가 커진 건 7월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규제 논란이 시작되면서다. 한·일관계가 악화되자 전경련은 이례적으로 정부를 공개 비판했다. “한·일관계가 악화될 상황을 알리는 신호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정부는 사전조치를 방관했다.(권태신 전경련 상근부회장)” 권 부회장은 한·일관계 특별대담에서 “지난 4월 전경련에서 개최한 한·일관계 진단 세미나에서도 ‘자민당이 최악의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있다’는 언급이 나왔다”며 정부에 쓴소리를 이어갔다.
이에 민주당이 반응했다. 한 달 뒤인 지난 8월 20일 여당 의원들은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과 일본 수출규제 등을 주제로 정책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간담회는 민주당 측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양준호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일관계가 경색된 틈을 타 전경련이 재벌의 필요성을 강조하면 거기에 맞춰 정치인들이 위기극복을 핑계로 손을 내미는 것”이라며 “과거 참여정부 시절부터 재벌 네트워크를 중시했던 당·정의 실세들이 선거를 앞두고 과거 방식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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