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력vs방어기제…화성 사건 경찰-용의자 '수싸움' 시작됐다
혐의 부인하면서도 조사는 3차례 응해…전문가들 "영웅심·호기심 있을 것"
진실규명 핵심은 자백…각종 면담기법 총동원할 듯
화성 연쇄살인 용의자 몽타주[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이것 봐요. 서류는 거짓말 안 해."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 속 서태윤(김상경) 형사의 대사다.
과학수사를 신조로 삼는 서 형사는 직감에만 의존하는 박두만(송강호) 형사에게 '서류는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증거에 기반한 수사는 오류 가능성이 적다는 뜻이다.
경찰이 강력범죄 사상 최악의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를 30여년 만에 특정했다. 비슷한 유형의 다른 사건으로 수감 중인 A(56)씨다.
A씨의 DNA는 총 10차례 연쇄살인 사건 중 5차·7차·9차 사건 증거물에서 나온 DNA와 일치한다. '서류'는 A씨를 연쇄살인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 셈이다.
DNA는 현존하는 과학수사 증거 중 가장 높은 신뢰도를 자랑한다. 하지만 이처럼 뚜렷한 증거가 나왔음에도 A씨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21일 경찰에 따르면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전담수사팀은 전날 형사와 프로파일러 등을 A씨가 수감 중인 부산교도소로 보내 A씨를 상대로 3차 조사를 벌였다.
3차 조사에서도 A씨는 자신과 화성 연쇄살인 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95년부터 수감 중인 A씨가 범행을 당장 인정할 유인책은 별로 없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공소시효는 이미 완성돼 더는 죗값을 물을 수 없지만, 1급 모범수인 그가 가석방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A씨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경찰의 교도소 면담 자체를 거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혐의를 부인하면서도 경찰 조사에 응한다는 점에서 A씨의 태도는 궁금증을 낳는다.
용의자가 수감된 부산교도소[연합뉴스 자료사진]
전문가들은 이런 A씨의 심리에 일종의 영웅심이나 호기심이 뒤섞여 있을 것으로 분석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경찰 이야기가 아주 터무니없거나 자신이 실제 연루되지 않은 사건이면 A씨가 아예 경찰을 만나지 않을 것"이라며 "아마도 경찰이 어떤 근거를 가졌는지 궁금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교수는 "A씨는 자신의 범행을 나름 '전설적'인 완전범죄로 생각할 테고 영웅 심리도 있을 것"이라며 "경찰이 사건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정보를 얻고 싶은 심리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교수는 "범인 입장에서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어떻게 수사되고 있는지가 초미의 관심사"라며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여년을 복역 중인 범인에게는 호기심도 작동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현재로서는 경찰이 이런 A씨를 상대로 쓸 수 있는 수단은 제한적이다. 수사는 형사처벌을 전제하는 활동인데,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영장 발부를 통한 강제수사 등 일반적 수사방식을 사용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형사법적 관점으로는 화성 사건에 대한 지금의 경찰 활동을 '수사'로 부르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견해도 있다.
통상적 수사에서는 DNA와 같은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피의자가 혐의를 부인해도 검찰에 송치하고 재판에 넘겨 법원 판단을 받아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경찰 이후 단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수사라기보다 '진실 규명작업'에 가까운 이번 사건은 최종 마무리까지 오롯이 경찰 몫이다.
재판으로 유무죄를 다툴 수 없고, 사실확인에 필요한 수단마저 제한적인 상황에서 진실을 규명하는 핵심은 당사자의 자백이다. 경찰이 DNA 등 여러 증거만으로 판단을 내놓더라도 자백이 없으면 이는 어디까지나 수사기관의 '추정'일 뿐이어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빠지는 셈이다.
이 때문에 경찰은 자백을 끌어내고자 A씨와 치열한 수 싸움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초반에는 막강한 방어기제로 무장하고 입을 굳게 닫는 강력범죄 피의자도 조사가 거듭되고 수사관과 라포(rapport·친밀감 또는 신뢰관계)가 형성되면 차츰 속내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A씨를 상대로는 라포 형성이 쉽지 않을 가능성이 커 수사가 길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곽 교수는 "A씨는 교도소에 20년 넘게 수감된 동안 자신을 합리화하는 방어기제가 벽처럼 강하게 구축된 인물일 것"이라며 "면담에서 라포를 형성해야 하는데 몇 차례 만남으로는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경찰은 A씨 주변에 대한 광범위한 탐문을 거쳐 그의 과거 습벽과 성향, 삶의 궤적 등 각종 정보를 축적하면서 이를 조사에 활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정보를 토대로 면담 대상자가 예민하게 반응할 감정선을 건드려 입을 열게 하는 등 다양한 면담기법이 총동원될 것으로 보인다.
곽 교수는 "범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들을 확보하고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여러 가지 시험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kih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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