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당 29000원, 아버지가 노동을 기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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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남긴 유품을 정리하다가 1980년 무렵부터 꾸준히 써온 아버지의 작업일지(메모)를 발견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작업 메모를 보면서 일요일도 쉬지 않고 일했던 당신의 고된 노동의 흔적을 새삼스럽게 다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어쩌면 제가 블로그에 글을 쓰고 사소한 일상을 <오마이뉴스>에 사는이야기로 남기고 오랫 동안 일기를 썼던 것도 어떤 DNA 차원의 유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긴 것은 일기와 같은 긴 글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몇년 몇월 몇일 어느 공사장에서 무슨 작업을 하였는지를 빠짐 없이 기록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매일매일의 작업 내역을 기록으로 남긴 까닭은 사실 단순합니다. 일당을 제대로 챙겨 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일당 29,000원 시절 아버지의 작업 일지 |
ⓒ 이윤기 |
건축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월급 대신 일당을 받습니다. 일당을 월급처럼 모아서 받지만 일한 날짜 만큼만 급여를 받는 것이지요. 여름 장마기간처럼 일을 못하는 날이 많으면 일당을 모아 받는 급여가 작아지고, 날씨도 좋고 일거리도 많아 쉬지 않고 일하면 그만큼 급여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통의 회사원이나 공장 노동자들처럼 정해진 월급 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원청에서 공사비 결제가 이루어져야 급여를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하청에 재하청이 이루어지는 건축 도급의 맨 아랫 쪽에 속해 있었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일요일이나 휴일에도 일을 하고 공사기일이 촉박하면 야간 작업, 휴일 작업도 다반사였습니다. 하지만 날씨가 나쁘거나 작업 여건이 안 되면 평일에도 그냥 쉬었습니다. 도급 공사를 맡지 못하면 더 길게 그냥 쉴 때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노동을 기록으로 남긴 까닭?
▲ 아버지의 월급 봉투 |
ⓒ 이윤기 |
▲ 하루 일당 8000원 시절, 아버지의 작업일지 |
ⓒ 이윤기 |
아버지는 이른바 오야지(도급 책임자)들에게 인기 있는 성실한 노동자였기 때문에 한 현장에서 작업이 끊어지면, 금세 다른 현장에서 일하러 오라는 부탁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한창 기운이 있을 때는 한 달 중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할 때도 있었습니다.
학교를 짓는 공사장에서는 비계를 설치하다가 다음 날엔 아파트를 짓는 공사장에서는 미장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음 날은 상가 건축 현장에서 타일 작업을 하는 방식으로 동시에 여러 작업장에서 다른 오야지들과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급여를 받을 때가 되면 서로 작업 일수를 따져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급여를 주는 사람과 급여를 받는 아버지가 기억하는 작업일 수가 다를 때도 있었고, 한 달쯤 지나고 나면 그날 어느 현장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때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매일매일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날 어느 도금 책임자가 맡은 어느 현장에서 무슨 작업을 했는지 빠짐없이 기록하였습니다 .
실제로 도급 책임자들과 급여를 계산할 때 아버지의 작업 일수를 적게 기록했을 때는 이 작업 일지를 들고 가서 바로 잡고 반박하는 일이 흔히 있었습니다. 아주 가끔은 오야지들이 고의로 작업일 수를 누락하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실수로 누락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의 작업기록이 가장 요긴한 증빙 수단이었습니다.
조금 더 세밀한 작업 내역이 기록되어 있었다면 사회적인 사료 가치도 있었겠지만, 단순한 개인의 인생 기록으로만 의미 있는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아물러 이 기록은 그가 얼마나 성실한 노동자였는지, 또 자식들에게는 얼마나 성실한 가장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합니다.
역사적 가치 있는 기록물은 아닐지라도... 자식에겐 의미있는 기록
당신의 노동은 젊은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1남 2녀의 어린 동생을 부양하였고, 결혼 후에는 아내와 2남 1녀의 자녀들을 부양하였습니다. 늘 최선을 다해 일하는 당신의 노동을 지켜 보면서 일찍부터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일 한다고 해서 (사회적)성공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몇몇 친한 친구들을 빼고는 아버지 직업이 건축 노동자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니 그 시절엔 건축 노동자라는 표현도 잘 쓰지 않았습니다. 그냥 '노가다'라고 불렀지요. 아버지도 사람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말 할 때 "그냥 노가다합니다"라고 하시더군요. 가정 환경 조사 때 아버지 직업을 '건축 근로자'라고 써내야 하는 것은 제 몫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아버지 직업을 더 자세히 묻는 것이 싫었던 기억이 또렷한 것으로 보아 대학에 가서 운동권 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늘 그랬습니다. 아버지 직업을 '건축 노동자'라고 떳떳하게 이야기 하게 된 것은 운동권학생이 된 이후부터 입니다. 아버지가 노동자라는 것이 성실한 노동자의 아들이라는 것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되었지요.
초등학교 공부가 전부였던 아버지가 공부를 좀 더 하셨다면 글을 잘 썼을지도 모릅니다. 군대 시절 아버지에게 받은 편지를 봐도 그렇고 매년 설날 아침에 듣는 아버지의 길었던 훈화를 생각해보면 사람을 설득하는 이야기를 참 잘하였습니다.
보통 30분에서 1시간까지 긴 시간 동안 자신의 생각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였는데, 그 시절 학교에서 듣던 교장 선생님의 훈화에 비한다면 전혀 지루하지도 않았고 명쾌하였습니다. 말하자면 1시간 정도의 강의를 해낼 수 있는 '말빨'을 갖추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야기들을 글로 옮길 수 있었다면 책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웃 사람들간의 다툼이나 일가친척들간에 갈등이 있을 때도 아버지는 훌륭한 중재자의 역할을 잘 해내셨습니다. 말년에 동네 재개발을 반대하는 일에도 앞장서셨는데, 조목조목 당신이 재개발에 반대하는 이유를 이웃들에게 잘 전달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잘 모아내셨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버지보다 글을 조금 더 익힌 제가 아버지보다는 좀 더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기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답니다. 아버지의 '기록 습관'이 제게 유전처럼 이어진 것은 기쁘고 고마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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