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미제’ 김정남 암살 사건의 4가지 미스터리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오른쪽)과 그의 이복형 김정남의 모습. AP뉴시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암살 미스터리’가 2년간 우여곡절 끝에 실망스러운 결말을 맞았다”(CNN)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을 살해한 혐의로 말레이시아 검찰에 기소됐던 피고인들이 모두 석방되면서 김정남 암살 사건은 발생 26개월 만에 영구미제로 남게 됐다. 2년 전 김정남 얼굴에 직접 VX(맹독성 신경작용제)를 발랐던 베트남 여성 도안티흐엉(31)까지 3일 출소하면서 이 사건은 ‘살해당한 사람은 있지만 죽인 사람은 없는’ 미스터리에 빠졌다. 암살을 지시한 배후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은 물론, 끝까지 풀리지 않을 의문점도 많다.
김정남, 2년 전 왜 말레이시아 갔나
사건의 처음으로 돌아가 보면 김정남이 2년 전 왜 하필 말레이시아에 갔는지 의문이 남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남인 김정남은 한때 후계자로 거론됐으나, 김정일이 사망한 뒤 이복동생인 김정은에게 밀려난 인물이다. 신변의 위협을 받았던 2001년 김정남은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밀입국하려다 적발된 이후 마카오나 중국에서 주로 머물렀다. 그는 김정은이 실권을 잡기 전 북한의 권력 세습에 대해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랬던 김정남이 왜 말레이시아를 찾았을까. 현지 경찰 수사 책임자는 지난해 1월 말레이시아 샤알람 고등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김정남이 2017년 2월9일 휴양지인 랑카위의 한 호텔에서 한국계 미국인 남성을 만난 것으로 파악됐다고 증언했다. 그는 또 김정남의 노트북을 분석한 결과, USB 저장장치를 꽂았던 흔적이 발견됐다고 했다.
마침 김정남이 갖고 있던 가방에는 12만4000만 달러(약 1억4000만원)에 이르는 현금이 나왔다. 당시 일본 외신들은 김정남이 방콕이 거점인 미국 정보요원을 만나 북한 관련 정보를 넘기는 대가로 돈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말레이시아 사법 당국은 김정남이 만난 미국인의 신원은 끝까지 파악하지 못했다.
김정남이 암살당하기 전 반북단체 ‘자유조선’의 지도자를 만났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3월 국가정보원 출신 김정봉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보비서관을 인용, 자유조선의 지도자로 알려진 아드리안 홍 창이 김정남에게 북한 망명정부를 이끌어달라고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김정남은 이 요구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홍 창과 김정남이 접촉한 정확한 시점은 밝혀지지 않았다.
화학무기 VX는 어떻게 반입 됐나
김정남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던 흐엉은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그의 얼굴에 맹독성 화학무기인 VX 신경작용제를 손으로 발랐다. 당시 김정남은 고통을 호소하며 이상증세를 보이다가 발작을 일으켰고,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숨졌다. 말레이시아 화학청에 따르면 김정남의 얼굴에서 검출된 VX의 농도는 치사량의 1.4배였다.
문제는 유엔이 지정한 대량살상무기(WMD) 중 하나인 VX가 어떻게 말레이시아에 들어오게 됐느냐다. VX는 피부를 통해 인체에 흡수되면 사린가스보다 최소 100배 이상의 독성을 발휘할 수 있는 신경작용제다. VX 제조에는 대규모 생산시설이 필요해 한 국가 차원의 지원 없이는 손에 넣기 어렵다.
일각에서는 ‘외교행낭’을 통해 VX가 반입됐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외교행낭이란 본국 정부와 재외공관끼리 주고받는 일종의 문서 가방으로 치외법권 적용 대상이다. 국제법상 소유국 동의 없이 주재국 정부나 제3국은 열어볼 수 없다. 북한은 외교행낭을 통해 대북 제재를 피해 우간다 내 북한 건설업체에게서 금괴와 현금을 받으려고 한 전력이 있고, 심지어 마약을 운반한 사례도 존재한다.
김정남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던 인도네시아 여성 시티 아이샤(왼쪽)와 베트남 여성 도안티흐엉. AP뉴시스
살해 혐의 받은 시티와 흐엉, 왜 갑자기 석방됐나
가장 최근에 의문이 제기된 사안은 김정남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던 인도네시아 여성 시티 아이샤(27)와 흐엉이 왜 갑자기 석방 됐느냐다. 말레이시아 검찰은 지난 3월11일 시티에 대한 공소를 돌연 취소했다. 법원은 무죄 선고도 없이 시티를 전격 석방했다. 말레이시아 사법당국은 검찰의 공소 취소 이유를 언급하지 않았으나, 당시 인도네시아 외교부는 대통령과 부통령, 외교 장관 등 고위급 인사들의 로비가 시티의 석방을 이끌었다고 밝혔다.
시티가 풀려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지난달 1일 흐엉 역시 살인 대신 상해 혐의를 적용받아 징역 3년4개월이 선고됐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살인 혐의가 확정되면 보통 사형 선고를 받는데, 갑작스럽게 혐의 자체가 변경된 것이다. 당시 검사 측은 “베트남 정부의 호소를 받아들여 혐의를 감경하는 게 어떻냐는 법무장관의 제안이 있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재판 기간 형기를 채운데다 모범수로 인정된 흐엉은 3일 오전 말레이시아 교도소에서 출소해 베트남 국적기를 타고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모두 시티와 흐엉이 석방된 배경에 양국의 ‘외교적 노력’이 있었다고 했지만, 앞서 말레이시아 당국이 두 사람을 ‘훈련된 암살자들’이라고 언급했던 것으로 미뤄볼 때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 건 사실이다. 일각에선 북한인 용의자를 모두 놓쳐버린 판국에 그들에게 이용됐을 가능성이 있는 여성들에게 섣불리 사형을 선고했다가 외교적 파장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북한으로 도주한 주범들의 행방은
김정남 피살 당시 흐엉과 아이샤에게 구체적으로 범행을 지시한 북한인 용의자 리재남(59), 리지현(35), 홍송학(36), 오종길(57) 등 4명은 사건 직후 출국한 뒤 러시아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아랍에미리트(UAE) 등을 경유, 평양으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이들을 포함한 최소 8명의 북한인이 암살 사건에 연루됐다고 밝힌 바 있다. 결국 주범들의 행방은 아직까지 묘연한 셈이다.
당시 체포된 북한인은 화학 전문가로 알려진 리정철(48) 뿐이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 사법당국은 리정철이 주범들에게 차량을 제공한 정황 밖에 물증을 파악하지 못해 그에게 추방 조치를 내리는 데에 그쳤다.
에번스 리비어 전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부차관보는 “김정남 암살 사건의 감독자, 설계자, 조직한 사람들 모두 (이 사건에서) 빠져나간 것”이라며 “국제공항에서 WMD로 사람을 죽인 이 끔찍한 공격에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게 된 셈”이라고 CNN에 말했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는 “이번 사건은 북한의 해외 비밀 작전의 또 다른 사례로만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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