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 그 이상이 된 김희애의 선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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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 그 이상이 된 김희애의 선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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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김희애표 불륜극’은 왜 다를까

김희애는 작품과 현실 양쪽에서 사회가 ‘중년 여성’에게 허용하고 기대하는 ‘선’을 꾸준히 넘어서며, 우리가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세계를 조금씩 열어왔다. YG엔터테인먼트 제공

최근 시청률 18%(닐슨코리아 집계)를 넘어서며 화제의 중심에 선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는 두말할 것 없는 ‘김희애 드라마’다. 건조한 미소 뒤로 울분을 토하다가도, 가까스로 삼키고 응징을 계획하는 차가운 눈빛. 주인공 지선우의 얼굴은 배우 김희애(53)의 노련한 연기로 매 순간 번뜩인다. 인생의 오점이 된 남편의 불륜을 ‘도려내려는’ 지선우의 기세보다 더 감탄스러운 것은, 그런 지선우를 선택하고 완성한 김희애의 안목과 능력이다.

“인생은 수많은 선택들의 총합”이라는 말처럼, 김희애의 37년 배우 인생은 그가 택한 수많은 인물과 서사로 설명된다. SBS <내 남자의 여자>(2007)부터 JTBC <아내의 자격>(2012), JTBC <밀회>(2014) 그리고 <부부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그는 ‘불륜극은 뻔하다’는 통념 위로 ‘김희애 불륜극은 다르다’는 공식을 새겨왔다. 통속이 정한 서사적 한계를 넘어서며 파격과 진보를 그려낸 ‘김희애표 불륜극’은 매번 뜨거운 호응을 얻어냈다.

김희애는 작품과 현실 양쪽에서 사회가 ‘중년 여성’에게 허용하고 기대하는 ‘선’을 꾸준히 넘어서며, 우리가 이전에 누리지 못했던 세계를 조금씩 열어왔다. 작품을 고른 이유를 물으면, 매번 “무엇보다 대본이 너무 재미있었다”고 답하는 김희애. 그에게 ‘재미’란 지금보다 한 발짝 앞서간 세계, 한층 더 넓은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극의 안팎에서 여성, 특히 중년 기혼 여성의 활동 반경을 꾸준히 넓혀온 김희애의 행보를 그가 ‘선택’한 작품들로 돌아봤다.

‘부부의 세계’서 보여주는 분노하는 개인

가련한 ‘본처상’ 지르밟고 전진하는 여성

모습통속극 문법 벗어난 불륜극 계보 그려온 그

여성 인물 다양화 흐름에 중심 역할

당당히 늙는 모습 보이겠다는 그의 ‘늙음’ 기대돼


배우 김희애(위 사진)의 37년 연기 인생은 통속과 편견에서 벗어나는 다양한 여성들의 얼굴로 채워져 있다. 왼쪽부터 SBS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 영화 <허스토리>,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한 장면. YG엔터테인먼트·NEW·SBS·JTBC 제공

■ 부부의 세계, 자신만을 위한 악다구니

얼핏 보기에 <부부의 세계>는 우리가 잘 아는 불륜 통속극과 크게 다르지 않다. 드라마 속 외도는 개인 간 문제를 넘어 가족과 모성 신화를 깨뜨리는 비도덕적 행위로 여겨졌다. 외도와 이혼은 그 유책 배우자가 누구든 여성의 실존적 위기를 의미했다. 한 여성의 정체성을 가족 내 아내, 엄마의 이름으로 한정해온 가부장제 습속 탓이다. “결국 이혼해봤자 비참해지는 건 여자뿐이더라”는 극중 설명숙(채국희)의 대사로 드러나는 이 ‘부부의 세계’도 예의 불륜극과 달라 보이진 않는다.

“내 아들, 내 집, 내 인생 뭐가 됐든 내 것 중에 그 어떤 것도 절대 손해볼 수 없어요. 이태오(박해준) 그 자식만 내 인생에서 깨끗이 도려낼 겁니다.”

그러나 지선우가 이 대사를 읊을 때, <부부의 세계>는 우리가 잘 아는 불륜극에서 한 발짝 나아간다. 아들, 집, 인생을 ‘부부의 세계’와는 상관없는 ‘내 것’이라 생각하는 지선우는 오로지 ‘나’만을 위해 남편 이태오의 외도를 응징한다. 경제적 능력, 사회적 지위, 가내 통솔력 등 모든 면에서 남편을 능가하는 지선우에게 남편의 외도는 ‘나’의 인생에서 도려내야 할 오점일 뿐이다. 남편에 대한 응징을 위해 급기야 아들을 위협하고 그의 안전까지 볼모 삼는 지선우는 엄마도, 아내도 아닌 그저 ‘분노하는 개인’이다. 외도한 남편과 함께 삶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던 자기 어머니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지선우의 선택이다. 그는 때로 “이혼하면 또다시 동정받는 여자가 될 것”이라며 휘청이기도 하지만, 기어코 다시 일어서 완벽한 삶을 위해 편집증적으로 달려간다.

<부부의 세계>에 쏟아지는 폭발적 반응은, 지금껏 TV 드라마가 기혼 여성에게 허하지 않았던 이 신선한 모습에 힘입는다. 대중은 선하고 가련한 ‘본처’의 상을 지르밟고, 이기적으로 전진하는 이 무서운 여성의 모습을 기다려왔다. 게다가 이 막장의 끝에서, 지선우가 유일하게 믿고 위하는 이가 데이트폭력 피해자인 다른 여성 민현서(심은우)라는 점은 <부부의 세계>가 내딛은 자리를 한층 새롭게 한다. 드라마는 그렇게 결혼과 연애에 얽매였던 여성들이 오직 여성 자신만을 위해 악다구니를 쓰는 신세계를 연다.

JTBC 드라마 <밀회>에서 김희애가 연기한 오혜원은 재벌들의 시중을 들며 어렵사리 성공의 외피를 붙들고 살던 ‘우아한 노비’였지만 이선재(유아인)와의 외도를 통해 재벌가 바깥의 세계를 만나 자유와 사랑을 찾고 사회적으로 각성한다. JTBC 제공

■ 뻔하지 않은 ‘김희애표 불륜극’

“그전엔 수동적이고 어딘가 소속된 존재였다면 지금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 바로 서는 캐릭터들이 살아난 느낌이다. 뭔가 더 진화하고 복잡하고 복합적인 생명체로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 배우로서도 더 자극된다.”(2019, 중앙일보)

지선우를 택하기 전부터, 김희애는 통속극의 문법을 벗어나는 불륜극의 계보를 만들어왔다. 그는 처연한 ‘본처’와 악독한 ‘상간녀’ 사이 다양한 얼굴이 됐다. 점차 다양해지는 여성 인물들의 변화에 김희애는 ‘축복’이란 표현을 썼지만, 변화의 중심에서 그가 해낸 몫이 적지 않다.

시작은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였다. 김희애가 택한 인물 이화영은 여고 동창생의 남편과 사랑에 빠져 동거까지 하는, 2007년 당시로선 가장 파격적인 ‘상간녀’였다. 파격은 ‘상간녀’의 평면성을 헤집는 입체성에서 왔다. 사랑에 빠질 때도, 버릴 때도 이화영은 자신만의 서사와 욕망으로 움직였다. 불륜 상대인 홍준표(김상중)와의 사랑이 허위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단호히 홀로서기에 나서는 이화영의 결론은 SBS <완전한 사랑>(2003), KBS <부모님전상서>(2004)에서 ‘가정의 소중함’을 역설하던 김희애의 종전 인물들과 완전히 다른 길을 냈다.

2014년작 <밀회>와 그 직전 작품인 <아내의 자격>은 그야말로 불륜극의 ‘신기원’을 열었다. 두 드라마는 불륜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찾는 40대 기혼 여성 윤서래와 오혜원의 모습에서 결혼 제도의 허위와 기득권층의 위선을 함께 들추는 실험을 선보였다. 자녀 교육 성공이 ‘아내의 자격’이라 믿는 시가와 남편에 의해 대치동으로 ‘내몰린’ 윤서래, 재벌들의 시중을 들며 어렵사리 성공의 외피를 붙들고 살던 ‘우아한 노비’ 오혜원. 두 인물은 각각 김태오(이성재), 이선재(유아인)와의 외도를 통해 대치동, 재벌가 바깥의 세계를 만나 자유와 사랑을 찾고 사회적으로 각성한다. 자본주의든, 가부장제든 사회가 주입하는 욕망과 맞서 싸우는 이들의 분투는 ‘불륜’ 이상이 됐다. 김희애의 불륜극이 ‘뻔하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결혼 제도가 생겨난 이래 수천년간 거듭됐을 외도란 ‘뻔한 주제’ 앞에서 김희애는 항상 ‘그 이상’을 포착해냈다. 그 속에는 늘, 한층 넓어진 여성들의 자리가 있었다.

김희애는 영화 <윤희에게>에서 가부장제의 압력에 사랑과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퀴어 여성 윤희를 연기했다. 리틀빅픽쳐스 제공

■ 늙어가는 여성 배우의 존재감

당연하게도 김희애의 선택 중에 불륜극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SBS <미세스 캅>(2015)의 ‘가정을 잊은’ 기혼 여성 형사 최영진, SBS <끝에서 두 번째 사랑>(2016)의 현실적인 40대 비혼 여성 강민주였고 한참 앞서서는 MBC <아들과 딸>(1992)의 지독히 차별받는 딸 이후남이 있었다. 그러나 드라마와 달리 영화계에선 중년 여성인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자리가 많지 않았다. “필요하면 머리 커트 치고 남성 캐릭터도 연기할 수 있다”(2018, 여성조선)는 농을 꺼낼 정도로, 성차별이 공고한 판이다.

김희애의 선택은 정면돌파였다. 그는 영화를 통해 현실이 외면하던 여성들 목소리를 길어올리기 시작한다. 드라마에서처럼 통속을 경유하지 않았다. 김희애는 영화 <허스토리>(2017)와 <윤희에게>(2019)를 연달아 택하며 여성 서사, 특히 중년의 여성 이야기에 목말랐던 관객의 갈증을 해소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법정싸움을 이끌었던 실존 인물 문정숙이 됐고, 가부장제의 압력에 사랑과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퀴어 여성 윤희가 됐다. 두 작품을 거치며 김희애는 2030 여성이 주축인 두꺼운 팬덤을 끌고 다니는 ‘희한한’ 중년 여성 배우가 됐다. 작품의 안과 밖에서 ‘위안부’ 피해자와 퀴어 여성 그리고 중년의 여성 배우로서 최선을 다해 존재해온 그의 시간은, 드라마와 영화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에게 위안과 본보기가 된 것이다. 늙어가는 여성 배우의 존재감은 생각보다 크다.

“나이 들었다고 어디 숨어 있는 것, 끝까지 현역에서 당당하게 자기의 늙어가는 모습을 동시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멋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후자다. 작품이 나를 불러주는 동안에 끝까지 일할 것이다.”(2019, 얼루어) 김희애가 보여줄 이 다음의 ‘늙음’은 무엇일까. <부부의 세계> 이후, 그의 선택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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