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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이탈 주민이 독일 통일 다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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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민 이주사 1949~1989
-분단의 벽을 넘어 또 다른 독일로 간 동독민 이야기
최승완 지음/서해문집·3만2000원

1989년 11월9일 저녁, 동독 집권당인 사회주의통일당 선전 담당 비서인 귄터 샤보브스키(1929~2015)는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앞으로 출국비자를 누구에게나 발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탈리아 언론 기자가 “언제부터?”라고 묻자, 답변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던 샤보브스키는 머뭇거리다 “내가 알기로는, 지금부터 즉시 효력이 있다”고 말했다. 이날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다. 수천명의 동베를린 시민이 서베를린으로 향했고 동독 경비병들은 검문소의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해 여름부터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를 통한 동독 주민들의 이탈 행렬이 이어지고, 동독 안에서도 여행 자유화 등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동독 집권당이 백기를 든 것이다. 1949년 독일이 분단된 지 40년, 1961년 베를린 장벽이 동서를 가른 지 28년 만이었다.

1989년 11월9일 저녁, 동독 집권당인 사회주의통일당의 선전 담당 비서인 귄터 샤보브스키가 여행 자유화 조처를 밝힌 몇 시간 뒤인 10일 새벽 서베를린 주민들이 베를린 장벽을 망치로 부수고 있다. 베를린/EPA 연합뉴스<동독민 이주사 1949~1989>는 독일 분단 40년간 동독 주민의 이탈과 서독 정착 과정을 역사적으로 살피면서 동독 주민의 이탈이 독일 분단사에서 갖는 의미를 규명한다. 저자인 최승완 박사는 독일 빌레펠트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독일 현대사 연구자다. 그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이전 연구들은 서독이 동독 이탈민 문제에 성공적으로 대응했다고 하면서 처음부터 서독이 동독 이탈 주민을 모두 받아들이고 정착 지원제도도 완비한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이를 바로잡고 싶었다”며 “역사적 관점에서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탓”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말 기준 남한에 온 북한 이탈 주민이 3만2476명(통일부 집계)에 이르는 우리가 상세한 연구 없이 독일을 성공 모델로 삼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경계한다. 독일과의 섣부른 비교도 삼간다.

동서 베를린의 접경인 베르나워 거리에 있는 건물의 서베를린 쪽으로 난 창문을 이용해 동독 주민들이 서베를린으로 넘어 오고 있다. 서베를린 주민들과 소방대원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모여 있다. 서해문집 제공분단 독일 때 서독으로 넘어간 동독 주민은 많게는 456만6300명, 적게는 357만3600명에 이른다. 대다수가 1950년대 동서 베를린 사이에 지하철과 도시고속철도가 운행할 때 동독을 떠났다. 동독이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을 세운 뒤 숫자는 크게 줄었다. 일부는 땅굴을 파고, 여권을 위조하고, 개조한 차량이나 열기구를 이용하고, 탈출 전문 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다. 이주를 신청해 합법적으로 떠난 이들도 있다. 책은 누가 왜 동독을 떠났고, 서독은 어떻게 대규모 이탈민을 수용하고 정착시킬 수 있었는지, 그리고 동독 이탈 주민들은 독일 통일에 어떤 구실을 했는지 고찰한다.

동독을 뜬 사람들은 젊고, 전문 직업교육을 받은 이들이 많았다. “동독으로서는 인구 구조와 생산 인구 충원 면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인적·경제적 손실이었다.” 서독에서 더 풍요롭게 살 기회가 많다는 경제적·직업적 이유, 동독 사회주의 정권의 탄압, 가족이나 결혼 등 가정적·개인적 이유로 동독을 떠났다.

“서독 사회가 두 팔 벌려 환영한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동독 이탈 주민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치적 난민’에 해당하는 이들만 ‘선별 수용’했다. 냉전의 산물이었다. 동독 체제의 부당함을 알리고 서독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했다. 동독 이탈 주민들은 빨리 정착했다. 서독은 모든 독일인에게 거주지와 상관없이 내국인과 같은 자격을 부여해 동독인에게 같은 국적을 줬다. 목돈으로 정착금을 지급하기보다 자립 기반 마련이 원칙이었다. 취업을 적극 유도하고 공공임대주택제도로 주택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저자는 연방정부와 주정부, 그리고 종교단체 등 민간 사회단체들의 협력과, 기존의 사회보험제도 안으로 동독 주민을 흡수한 것이 정착에 큰 구실을 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라인강의 기적’이 있었다. “대규모 탈동독 행렬과 서독 경제의 폭발적 확장이 병행된 것은 이탈 주민과 서독 사회 모두에게 행운이었다.”

성공의 이면에는 애환도 있다. 동독 이탈 주민들은 사회적·직업적 강등, 차별을 겪었고,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에 적응해야 했다. 여성은 더 심했다. “남녀평등의 기치 아래 여성의 직업 활동을 장려한 동독에 비해 서독은 현모양처와 가정의 의미를 강조하며 취업을 장려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편견이 이들을 힘들게 했는데, ‘잠재적 간첩’으로 의심받았다. 1965년 서독인 337명한테 물으니, 응답자의 61.4%가 동독 이탈 주민이 국가의 지원을 받아 서독인보다 더 나은 상황에 있다고 답했다. “자신의 처지가 불만족스러운 서독인은 언제든 이탈 주민 탓을 했다.” 사회적·심리적 통합은 경제적 통합보다 훨씬 어렵고 시간이 더 걸리는 문제였다.

서독에서 동독으로 옮겨간 주민도 많게는 64만6천명, 적게는 47만5천명에 이른다. 3분의 2 가량은 동독에서 서독으로 왔다 다시 동독으로 돌아간 사람이었다. 가족·친구에 대한 그리움 등 개인적·가족적 이유가 컸다. 사회주의 신념에 따른 선택은 일부였다. 동독 사회도 이들을 의심했다. “십중팔구 ‘정신 나간 멍청이’거나 죄를 짓고 도망쳐온 범죄자, 일하기 싫어하는 사회 부적응자일 것이라고 단정지었기 때문에 서독 이탈 주민은 주변의 불신을 감내해야 했다.” 어느 쪽에서건 이탈 주민들한테는 냉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

동독을 방문해 가족을 만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서베를린 주민. 서해문집 제공그러나 수백만명의 동독 이탈 주민은 냉전과 분단 체제를 밑에서부터 조금씩 잠식해 나갔다. 이들은 동독의 가족·친구들과 편지와 소포를 주고받고 서로 방문했다. “분단이 고착화되고 이질감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이들의 존재는 여러 면에서 동서독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였다.” 1968~1988년 서독에서 동독으로 17억8500만통, 동독에서 서독으로 22억5000만통의 편지가 발송됐다. 서독에서 동독으로 가는 소포에는 커피와 초콜릿 등이 담겼다. 동독은 경제계획을 수립할 때 ‘소포 경제’를 반영할 정도였다. 1970년대에는 상호방문 기회가 넓어져 해마다 수백만명의 서독 주민들이 동독을 방문했다.

서독 주민들이 동독에 사는 가족들을 만나 기뻐하고 있다. 서해문집 제공동독 이탈 주민들은 향우회와 동향단, 중부독일인연맹 등을 만들어 통일이 서독의 정치 현안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동서독 관계가 개선될 때 ‘평화 교란자’ ‘냉전을 부추기는 싸움꾼’으로 인식되기도 했으나, 통일 논의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데 기여했다.

동독 이탈 주민과 견주면 북한 이탈 주민의 규모는 적다. 남과 북은 이산가족 상봉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독일과는 상황이 다르다. 그럼에도 저자는 조심스럽게 독일의 사례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한다. 대규모 이탈 주민을 맞은 서독 연방정부와 주정부, 시민단체의 보완적 협력을 배우고, 적극적인 사회통합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독 이탈 주민을 통해 분단국의 이탈 주민이 분단의 벽을 허무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염두에 두고, 우리 역시 북한 이탈 주민을 불청객으로 보는 부정적 인식에서 벗어나 이들이 남북한의 가교로서 갖는 잠재력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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