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떠난 큰무당…배연신굿 보유자 김금화 별세
영화 '만신' 실제 모델…한미수교 100주년 친선공연으로 세계적 명성
"무당은 됨됨이가 중요…남의 덕 잘 빌어주려면 내가 덕이 있어야"
만신 김금화 씨 별세(서울=연합뉴스) 무속인·무용가인 만신 김금화 씨가 만 88세의 나이로 23일 오전 5시 57분 별세했다. 김금화 씨의 빈소는 인천 동구 청기와장례식장 204호에 마련 됐으며 발인은 오는 25일 오전 6시 40분이다. 2019.2.23 [연합뉴스 자료사진] photo@yna.co.kr
(서울·인천=연합뉴스) 박상현 윤태현 기자 = 국가무형문화재 제82-2호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보유자인 큰무당 김금화 씨가 23일 오전 5시 57분께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1931년 황해도 연백의 가난한 집안에서 둘째 딸로 태어난 김 씨는 12세 때 무병(巫病)을 앓다가 17세에 외할머니이자 만신(萬神·여자 무당)인 김천일 씨에게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됐다.
고인은 나라굿과 대동굿을 혼자 주재할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아 19세에 독립했다.
그는 자서전 '비단꽃 넘세'에서 신내림 당시 경험에 대해 "나는 일어나 춤을 추었다. 춤을 추다 보면 나도 모르게 몸의 움직임이 격렬해지고 머리가 쭈뼛거렸다. 그 순간 내 몸 안으로 신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며 "환영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설움이, 배고픔이, 아픔이, 원망이 뜨거운 눈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갔다"고 회고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월남한 그는 무속인 방수덕 씨와 인천과 경기도 이천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65년 서울로 활동지를 옮겼다.
그는 1972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해 '해주장군굿놀이'로 개인연기상을 받으며 민속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날카로운 작두 위에서 춤을 추며 어장의 풍어(豊魚)를 기원하는 '서해안풍어제'로 유명했다.
고인은 새마을운동과 맞물려 굿이 미신으로 인식되면서 멸시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맞아 미국 로스앤젤레스 녹스빌 국제박람회장에서 열린 친선공연에서 '철무리굿'을 선보여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5년 국가무형문화재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보유자로 인정됐다. 이 굿은 황해도 해주·옹진·연평도에서 성행하던 굿으로, 배연신굿은 선주의 개인 뱃굿이고 대동굿은 마을 공동 제사를 뜻한다.
고인은 이후 백두산 천지와 독일 베를린, 프랑스 파리 등지에서 대동굿과 진혼굿 등을 공연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왔다. 김금화의 굿은 서구에 한국 문화를 알리는 데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무녀로 자리매김한 고인은 사도세자, 백남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위한 진혼제와 세월호 희생자 추모위령제를 지냈다.
한편으로는 2000년 서해안풍어제보존회 이사장에 취임하고, 2005년 인천 강화도에 무속시설 '금화당'을 열어 후진 양성과 무속문화 전수에 힘썼다.
고(故) 김금화 씨가 2015년 굿을 펼치는 모습[연합뉴스 자료사진]
2014년에는 고인의 일생을 담은 영화 '만신'이 개봉돼 무속문화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찬경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토론토 릴 아시안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장편영화상을 받았다.
이에 앞서 2013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비단꽃길'도 고인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서슴없이 작두에 올랐던 고인은 국립무형유산원이 2017년 펴낸 구술록에서 "무당은 됨됨이가 제일 중요하다. 남의 덕을 잘 빌어주려면 내가 먼저 덕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무형문화재로 인정된 다음부터 우리 무당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며 "그래도 다들 옛것을 찾으면서 즐거워하니까 나도 기뻤다. 내가 가진 재주로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조황훈(자영업) 씨가 있다. 조카 김혜경 씨는 서해안 배연신굿 및 대동굿 이수자다.
빈소는 인천시 동구 청기와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25일 오전 6시 40분, 장지는 인천 부평승화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