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못질 아이를 왜 낳아요?"…절망 빠진 청년들
스마트이미지 제공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결국 돈이 들기 마련입니다. 안정적인 일자리가 있어야 결혼을 하고 애를 낳는 것은 당연한 상식처럼 들립니다.
실제로 감사원이 지난달 한국노동패널조사를 분석했는데, 요약하면 일자리가 없으면 결혼을 꺼리고, 남성은 좋은 일자리를 가져야 결혼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입니다.
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7년 저출산 전문가들에게 정책과제 순위를 물었는데요. 주거 지원, 고용 및 일자리, 중소기업의 일·가정 양립 실천 등 경제·고용 관련 정책을 강조했습니다. 역시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려면 돈과 일자리 문제가 중요하다는 얘기입니다.
이처럼 안정적인 일자리가 있어야 결혼을 하고 애를 낳는 것은 당연한 상식으로 보이지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당장 일자리가 없거나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아이는 낳을 수 있습니다. 언제든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믿음, 일만 열심히 하면 가정을 꾸릴 수 있다는 희망, 더 좋은 일자리로 옮길 수도 있다는 전망이 있다면 말입니다.
예, 지금 이 기사를 읽는 많은 분들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나도, 내 아이도 수저 색깔 바꾸기는 틀렸어…절망에 사로잡힌 청년들
한국 사회에서는 더 이상 이런 희망을 찾기 어렵습니다. 최근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청년 일자리 인식 설문조사'에서 응답한 청년(만18~29세) 542명 중 62.9%는 청년 일자리 상황이 나빠질 것이라고 전망했고, 70.4%는 열심히 일해도 부자가 되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정부 통계도 살펴볼까요? 통계청이 2년마다 실시하는 '사회조사'를 보면 2019년 본인 세대의 계층이 상승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응답자의 22.7%에 불과해 4명 중 1명도 되지 않습니다.
2019년 사회조사 계층이동. 통계청 제공
더 큰 문제는 이런 긍정적 답변이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2009년에는 본인 세대의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은 응답자가 37.6%, 2013년만 해도 31.2%였는데, 2015년과 2017년부터 모두 22.7%로 뚝 떨어졌습니다. 사실상 더 나빠질 수 없는 바닥까지 떨어진 셈입니다.
기성세대들이 흔히 가졌던, 본인은 고생하더라도 자식은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믿음도 깨졌습니다.
자식 세대의 계층이 더 높아질 것이라는 답변은 2009년에는 48.3%로 절반에 가까웠지만, 2015년에는 30.0%로 떨어졌고 2017년 29.5%, 2019년 28.9%로 폭락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이른바 '수저계급론'이 유행한 시점도 바로 2010년대 중반 무렵입니다. 경제력 격차를 개인의 노력으로 뚫기 어렵고, 부모의 경제적 위치를 물려받을 수밖에 없다는 좌절감은 이제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시대정신'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넘기 힘든 취업의 벽에 속출하는 '취업포기자'들, 육아를 포기 안할까
이런 부정적인 태도는 '노오력'으로 극복할 수준이 아닙니다. 우선 고용시장에 진입하는 일부터 쉽지 않습니다. 지난해 청년(만15~29세)고용률을 보면 42.2%입니다.
10대는 대부분 학생인 점을 감안해 20대만 살펴봐도 55.7%에 불과합니다. 전체 고용률이 65.9%이고, 60대 이상을 제외한 30~59세는 모두 70% 이상인 것과 비교하면 청년 세대의 고용률이 유독 낮습니다.
15세 이상 전체 경제활동참가율과 20~29세 경제활동참가율. 국가통계포털 인용물론 고용시장에 막 진입하기 시작한 청년들은 이미 취업 경쟁을 마친 다른 세대보다 고용률이 낮기 마련입니다. 더 큰 문제는 취업의 벽에 부딪혀 구직조차 포기한 청년들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해 취업자와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찾고 있는 실업자를 합한 비율인 경제활동참가율은 20~29세에서 61.2%로, 전체 연령의 평균치 62.5%보다 낮았습니다.
20대 경제활동참가율이 평균치 아래로 떨어진 일은 경제활동인구조사에서 비교 가능한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00년 이후 처음입니다.
특히 취업할 의사도, 가능성도 있지만 노동시장 상황 때문에 취업을 포기한 '구직단념자'가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청년 구직단념자가 21만 9188명으로 2015년(18만 5254명)보다 18.3%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정부도 청년 일자리 지원에 골몰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점을 찍었던 2013년 39.5% 이후 청년고용률은 꾸준히 상승해 2019년 43.5%까지 올랐고, 다만 지난해에는 코로나19 위기 탓에 한풀 꺾였습니다.
코로나19 변수를 제외하면 문재인 대통령 집권 이후 청년 고용 지표가 꾸준히 개선됐다는 주장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턱없이 부족한 '좋은 일자리'…'존버'하고 나면 애 낳기는 글렀어
그런데 저출생 문제를 해결하려면 단순히 청년들의 일자리가 늘어나느냐 여부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질 좋은 일자리가 충분하냐는 점입니다.
관건은 크게 둘입니다. 우선 아이를 낳아도 되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질 정도로 질 좋은 일자리여야 한다는 것과, 이런 일자리에 최대한 빨리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고용시장은 두 가지 모두 실패하고 있습니다.
우선 질 좋은 일자리는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질 좋은 일자리의 비율은 기준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정부는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에서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처럼 청년층이 선호하는 일자리 비중이 전체 일자리의 20%에 불과하다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대기업 노동자의 월 평균소득은 515만 원, 중소기업은 245만 원으로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평균근속기간도 8.2년과 3.4년이니 생애 전주기로 보면 소득 격차는 더 벌어집니다.
여기에 각종 사회보험 가입률이나 복지혜택, 사업장의 입지 조건과 직주 근접성, 원청 갑질 등 온갖 노동조건 차이도 고려해야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경우 고용형태에 따라 일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직접 비교하기 어렵지만, 지난해 정규직의 시간당 임금총액은 2만 731원, 비정규직은 1만 5015원으로 정규직의 72.4%에 그칩니다.
기업체 규모별 1년 후 노동이동(위)과 1년 후 고용지위의 변화(아래). 한국은행 제공
일단 질 나쁜 일자리라도 취업한 후 좋은 직장으로 옮길 수 있다면 희망이 보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2018년 한국은행에 따르면 임금노동자가 중소기업에 취업해 1년 후 대기업으로 이동하는 비율은 2015~2016년 2.0%에 불과했고,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이동한 비율은 2004~2005년 15.6%에서 2015~2016년 4.9%로 크게 떨어졌습니다.
물론 열악한 노동조건에도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혹은 한 번 질 나쁜 일자리를 가지면 평생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스펙'을 높이기도 하죠.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저출생 문제 해결로는 이어지지 않습니다. 결혼, 출산이 늦어지기 때문입니다.
35세 이상 고령 산모 비중은 2000년 17.1%에 불과했지만, 지난해는 33.8%에 달해서 아이를 낳은 엄마 3명 중 1명이 고령 산모입니다.
또 어머니가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의 연령을 보면 2010년에는 30.1세였는데, 지난해는 32.3세로 매년 꾸준히 상승세로 '고령 산모'의 기준인 35세에 육박합니다. 심지어 아버지는 같은 기간 32.8세에서 35.0세로 고령화 속도가 더 빠릅니다.
이처럼 아이를 늦게 낳으면 첫 아이를 낳더라도 '동생'을 낳지 않게 됩니다. 1년 동안 태어난 아이 가운데 첫째아이가 차지한 비중이 2010년에는 50.4%, 둘째가 38.9%, 셋째 이상은 10.7%였는데 지난해는 각각 56.6%, 35.1%, 8.3%로 바뀌었습니다. 둘째 이상을 낳는 사례가 그만큼 빠르게 줄어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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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현실과 계층 이동 가능성도 낮다는 절망감, 이를 극복해도 아이까지 낳아 기르기에는 남은 시간이 부족하다는 초조함까지 겹치면 '책임지지 못할 아이, 낳지도 말자', '아직 얼굴도 본 적 없는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이미 충분히 팍팍한 내 인생을 갈아넣을 수는 없다'는 무력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 단기 일자리로 애 낳을 수 있어?…"고용의 뿌리 가꿀 중장기 대책에 소홀해"
물론 정부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종 청년 일자리 지원 대책을 해마다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앞서 말씀드린대로 청년 고용지표가 점차 개선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고용 위기와 '출생 절벽' 앞에 충분한 대책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우선 정부가 일자리 대책을 내놓을 때마다 단골로 지적되는 문제는 공공부문 직접 일자리가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대부분 정부 지원이 끊기면 사라지는 임시 일자리, 1~2년 계약 기간에 그치는 단기 일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스마트이미지 제공
물론 비록 저임금 단기 일자리라도 아예 일자리가 없는 것보다는 낫겠죠. 민간부문에서 일자리를 찾기 힘든 장애인, 고령층과 같은 취업취약계층에게는 더 절실합니다. 더구나 코로나19 사태로 민간부문에서 일자리를 창출하기 어려웠던 측면도 고려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일자리 공급 정책의 비중입니다. 한국고용정보원 고재성 청년정책허브센터장은 "더 좋은 일자리로 노동자들이 이동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직업 훈련, 경력개발 지원 제도는 개별 기업에서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어 반드시 공공 부문에서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일자리 성과를 늘리기 위한 정책에 이러한 중장기 사업들은 항상 뒤로 밀려나 예산,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죠.
이어 "기존의 고용센터로는 이를 감당할 인력도, 여건도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형태의 공공서비스조직, 지원제도를 궁리할 때가 됐다"며 "차라리 지방정부가 해당 지역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맞춤형으로 개발하고, 정부는 예산, 인력을 지원하는 등 수요자 중심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습니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유빈 동향분석실장은 "질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일은 단순히 일자리 수를 늘리고 임금만 보전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며 "일하는 환경, 사회적 인정, 주거 정책 등 다양한 정책과의 연계, 산업구조의 체질 개선의 큰 그림을 갖고 추진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고 센터장도 "중견·중소기업 일자리의 질을 높이려면 기존 기업을 개선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기존 산업구조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크게 바꾸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차라리 새로 창업하는 중소기업에서 반드시 괜찮은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접근해 장기적으로 고용시장의 기준을 높여가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청년들은 특고·플랫폼에서 일하는데…질 좋은 일자리 찾기, 진단부터 늦었다
청년 일자리에 대한 정부의 문제의식과 정책 목표가 번지수부터 틀렸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그동안 정부는 노동시장이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공공부문-민간부문으로 노동시장이 양극화됐다고 진단하고, 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강조해왔습니다.
박근혜 정부 당시 최경환 부총리의 '정규직 과보호' 발언을 시작으로 추진된 일련의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이나, 현 정부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 인상 정책 등은, 비록 정책 방향은 정반대지만, 노동시장의 양극화라는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정책들입니다.
하지만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종진 연구위원은 "2014년~2019년 사이에 프리랜서, 특고, 플랫폼 노동자로 분류되는 인원이 약 400만명 증가했는데, 이들은 정규직과 1대1로 맞대응해 전환할 수도 없다"며 "기존의 법·제도에 없는 일자리가 급격히 늘어나고, 노동시장이 2중화가 아닌 3중 시장으로 변하고 있는데 정부 대책은 10년, 15년 전 얘기를 반복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특수고용노동자(특수형태근로자, 이하 특고)와 프리랜서와 플랫폼 노동자는 아직 정의도, 범위조차 불분명합니다. 그 규모도 기준에 따라 다른데요. 특고는 약 230만명, 프리랜서는 약 400만명으로 추산됩니다.
또 플랫폼 노동자의 경우 지난해 한국노동연구원이 좁게 보면 22만명, 넓게 보면 179만명으로 계산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기준과 대상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정확한 규모조차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동안 노동자 개념조차 불확실했던 이들에 대해 최근 정부는 노동자로서의 성격을 적극 인정하면서 '전국민 고용보험' 보호망 안에 담으려고 추진 중입니다. 특히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지난 6월부터 플랫폼 노동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노사정 대화를 시작했지만, 모두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합니다.
이에 대해 김 위원은"이제 청년들이 사회에 진입할 때 첫 직장은 정규직이나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비정규직 일자리가 아닌 특고,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급변한 일자리 지도에 맞는 촘촘한 고용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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