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20년만에 다시 탈레반의 나라로…미군 철수에 정부 항복
아프가니스탄이 20년 만에 다시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의 나라가 됐다.
15일 AF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압둘 사타르 미르자크왈 아프간 내무부 장관은 이날 "과도 정부에 평화적인 권력 이양이 있을 것"이라며 탈레반에 사실상 항복을 선언했다.
스푸트니크 통신은 알 아라비야 보도를 인용,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이 곧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보도했다.
탈레반이 아프간 전역을 장악한 후 이날 수도 카불까지 진입하자 정부 측이 백기 투항한 것이다.
탈레반으로서는 2001년 미국의 침공으로 정권을 잃은 지 20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한 것이다.
'카불 최후의 날'이 다가오면서 현지 주민은 패닉 상태에 빠졌고 국제공항에는 국외로 탈출하려는 이들이 몰려들었다.
현지 각국 대사관도 혼비백산한 채 탈출을 서두르는 모습이다. 미국 대사관은 본격적으로 철수를 시작했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를 지원하기 위해 미군 5천명 배치를 승인했다.
아프간 라그만주에서 차에 탈레반 상징 깃발을 꽂고 이동 중인 탈레반 전투요원. [AFP=연합뉴스]
2001년 미군 침공으로 밀려난 탈레반…20년만에 권력 되찾아
탈레반은 1994년 남부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결성됐으며 이슬람 이상국가 건설을 목표로 내걸고 세력을 넓혀갔다.
파키스탄 등의 지원을 등에 업은 탈레반은 1996년 무슬림 반군조직 무자헤딘 연합체로 구성된 라바니 정부까지 무너뜨렸다.
하지만 탈레반은 2001년 9·11테러 직후 범행 배후인 알카에다 수장 오사마 빈 라덴을 넘기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다가 미군의 침공을 받고 정권을 잃었다.
이후 정부군 등과 20년 전쟁을 이어가며 세력을 회복했다.
그러다가 지난 5월 미군 철수 본격화를 계기로 전국적인 총공세를 펼쳤다.
부패한데다 사기마저 저하된 정부군은 곳곳에서 추풍낙엽처럼 무너졌다.
탈레반은 지난 6일 남서부 님로즈주 주도 자란지를 시작으로 이날 카불과 인접한 동쪽 잘랄라바드(낭가르하르주 주도)와 서쪽 마이단 와르다크(마이단 와르다크 주도)까지 주요 도시와 국경 초소를 모두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전날 카불 남쪽 11㎞ 지점 로가르주 지역까지 진격, 정부군과 전투를 벌인 탈레반은 이날 카불로 들어섰다. 탈레반은 카불을 무력으로 점령할 계획이 없다며 '평화적 투항'을 촉구했고 결국 아프간 정부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탈레반은 이날부터 곧바로 권력 인수 준비에 들어갔다. 아프간 정부군에게 귀향이 허용될 것이라며 군대 해산을 요구했고 공항과 병원은 계속 운영할 것이라고 밝혔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13일 수도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을 통해 출국하려는 주민 [AP=연합뉴스]
'최후의 날' 카불…주민 패닉·공항엔 탈출 인파
'최후의 날'이 다가오자 카불의 지역 사회는 패닉에 빠졌다.
외신에 따르면 이날 탈레반의 공격이 임박하자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는 해외로 탈출하려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카불에서 외부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공항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황이 다급하게 돌아가자 재력이 있는 주민들은 항공권을 구하기 위해 공항으로 달려가고 있다.
AP통신에 따르면 공항 터미널 밖 주차장에 마련된 항공권 판매 창구에는 표를 사려는 사람들로 줄이 늘어섰다.
아리아나 아프간 항공, 캄 에어 등 현지 항공사의 국제선 항공편은 이미 다음 주까지 예약이 꽉 찬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붕괴 위기에 처하자 카불 주민은 달러 사재기와 함께 앞다퉈 현금 인출에 나서는 모습도 보였다.
아프간 톨로뉴스는 전날 카불의 은행이 달러를 찾으려는 사람들로 혼잡을 이뤘다고 보도했다.
이로 인해 아프가니/달러 환율이 지난주 80아프가니에서 100아프가니로 오르기도 했다.
주민들은 은행이 갑자기 폐쇄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현금자동입출금기(ATM)에도 길게 줄을 섰다.
이런 혼란 속에 카불로 밀려드는 피란민 수도 늘어나고 있다.
비정부기구(NGO) 세이브더칠드런은 최근 카불에 온 피란민은 약 12만 명이고 이들 중 7만2천 명이 아동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카불은 1천28㎢ 크기로 서울 면적(605㎢)의 두 배가량이며 약 460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 카불 주재 미국 대사관 [AP=연합뉴스]
짐 싸는 미국 대사관…"사이공 함락 속편"
이달 말로 철군 시한을 제시한 미국은 현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이날 카불 주재 대사관 외교관들의 철수를 시작했다.
미국 외교관들은 민감한 문서나 자료 등을 폐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철수 작업에는 헬기가 동원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전날 아프간 내 미국요원의 안전한 감축 등을 위해 기존 계획보다 1천 명 늘린 5천 명의 미군을 배치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현지 미국대사관 직원과 동맹국 요원들의 안전한 감축, 그리고 아프간전 때 미국을 도운 현지인의 대피를 돕는 임무를 수행한다.
이날 미국 해병대 일부가 카불에 도착했고, 선발대는 전날 먼저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의 요원과 임무를 위험에 빠뜨리는 어떤 행동도 신속하고 강력한 군사적 대응에 직면할 것이라는 경고를 탈레반 측에 전달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다른 나라의 내정에 미국의 끝없는 주둔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며 철군 방침도 재확인했다.
미 정부 고위 관계자도 이날 아프간 상황과 관련해 탈레반이 미군 철수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기존 철군 전략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탈레반이 미군 철수 공식화 이후 빠르게 점령지를 확장하자 1970년대 베트남전 막바지 상황과 비슷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미군이 철수한 후 무능한 정부가 순식간에 무너졌고 민간인과 외교관의 탈출 과정에서 아수라장이 빚어졌다는 점에서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최근 "바이든 대통령의 이번 결정으로 우리는 치욕적인 '1975년 사이공(현재 베트남 호찌민) 함락'의 속편으로 나아가게 됐고 심지어 상황이 그때보다 나쁘다"라고 지적했다.
영국 정부도 로리 브리스토 아프간 주재 자국 대사를 오는 16일 저녁 전까지 아프간에서 탈출시킬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 외무부는 브리스토 대사를 비롯한 일부 관계자를 공항에 남겨 이달 말까지 대피 작전을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상황이 악화하면서 기존 계획을 변경했다.
영국 대사관 측은 이날 기준 아프간 주재 자국 외교관과 정부 관계자 규모를 기존 500명에서 수십 명 안팎으로 줄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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