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격장·차량·숙소까지…여군에게 성범죄 안전지대 없었다
군사법원 판결문 91건 분석
여군 대상 성범죄 ‘부대 안’ 최다
10건 중 6건이 ‘상관에 의한 성폭력’
하급자들 사이서도 성적대상화 만연
실형 16%뿐…민간재판보다 낮아
게티이미지뱅크
성추행 피해 신고 뒤 보호와 지원이 아닌 회유, 무마, 늑장·부실 수사로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이아무개 중사의 죽음 이후, 군내 성범죄 실태와 사건 처리 방식에 대한 개혁 요구가 커지고 있다. 군 성범죄 실태를 살펴보면 이 중사의 죽음은 어쩌다 벌어진 불운한 사건이 아니다. 여군 대상 성범죄에 관대한 폐쇄적 남성중심 조직문화가 만성화한 결과라는 것이다.
<한겨레>는 7일 군사법원 판결서 인터넷 통합열람·검색 서비스에서 ‘여군’을 키워드로 추출한 판결문 91건(2015년 1월1일~2021년 6월1일)을 전수 분석했다. 여군이 피해자인 사건 죄목으로는 강제추행·준강간 등 성범죄가 88건(96.7%)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중 강간·준강간 등 심각한 성범죄도 20건(21.9%)에 이르렀다. 부대 안, 업무 뒤 회식자리, 휴식을 취하는 여군 숙소까지 여성 군인이 성범죄로부터 안전한 장소는 없었다. 상명하복 계급장 문화, 여군에 대한 성적 대상화, 남성 군인보다 업무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취급해온 군 안팎 인식이 군내 만연한 성범죄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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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정비고, 군수과 사무실, 유격훈련장, 흡연장, 사격장, 소속대 막사….
업무 공간이어야 할 군부대가 성범죄 장소로 둔갑하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났다. 판결문에 등장한 성범죄 발생 장소로는 부대 안(40건, 43.9%)이 가장 많았다.
‘장난’이나 ‘격려’를 빙자한 신체접촉과 강제추행은 업무 공간이면 어디에서나 일어났다. 가해자들은 업무를 보고 있는 여성 군인의 엉덩이를 무릎으로 슬쩍 건드리거나, 사격 자세를 잡아준다며 몸을 밀착하거나, 별 이유 없이 옆구리나 허벅지를 쿡 찔렀다. 심지어 훈련지원을 위해 다른 부대로 이동하는 상황에서도 차 안에서 강제추행이 벌어졌다. 통상 직급상 하급자인 피해자들은 이런 강제추행을 모멸감을 참아가며 견디다가 수차례 반복된 뒤에야 군 수사기관에 신고했다.
강간이나 준강간 등 심각한 성범죄는 부대 밖에서, 회식자리나 개인 술자리 전후로 주로 발생했다. 식당(3건), 노래방(8건), 귀가 차량 안(7건) 등에서 벌어진 성범죄가 그런 경우다. 회식자리에서 남성 상급자는 은근슬쩍 여성 하급자의 몸을 만지거나, 노래방에서 블루스를 추도록 강권하고, 강제로 입을 맞췄다. 만취해 의식이 없는 여성 하급자를 남성 상급자가 모텔이나 거주지, 차량 등에서 성폭행한 사례(준강간·준강제추행 등)도 11건에 이르렀다.
여군이 휴식을 취하는 사적 생활공간도 성범죄 장소가 되긴 마찬가지였다. 판결문에 담긴 여군 대상 범죄 중 23%가 여군 거주지에서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여군이 거주하는 숙소에 몰래 들어가 물건을 훔치거나 추행을 하는 등의 범죄가 10건에 이르렀다. 지난 2019년 한 육군 병사는 새벽녘 여성 군인들이 사는 아파트에 14차례에 걸쳐 침입했고, 자신의 체액을 화장실에 비치된 바디워시 통에 섞어 넣었다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휴대전화, 소형카메라 등을 이용한 불법촬영 사례도 빠지지 않았다. 지난해 5월 한 육군은 여군 샤워장 환풍기 날개 틈으로 휴대전화를 집어넣어 동영상을 촬영하다 발각됐다. 피해자는 자신과 같은 소속대에서 함께 근무하는 여성 군인이었다. 2017년에는 한 공군이 여군 휴게실에 몰래 들어가 보조배터리형 몰래카메라를 설치했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단기 전역을 하려고 마음을 먹었나 보네.” “소대장 하고 싶다고 했지? 아 좀 힘들 텐데.”
지난해 1월 부하 장교를 추행해 벌금형이 선고된 한 육군부대 장교는 피해자에게 자신의 ‘1차 평정권’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이처럼 상급자가 장기복무나 진급을 희망하는 초급간부에 대한 인사평정권을 악용한 사례는 판결문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유형이다. 상관에 의한 성폭력(57건, 62.6%)이 가장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피해자는 막 초임지에 부임하거나 장기복무 평가를 앞둔 부사관(하사 18건, 중사 6건)이 가장 많았다. 중위·대위 등 위관급 장교가 피해자인 경우도 13건으로 적지 않았다. 판결문에서 확인된 가해자는 부사관과 위관급 장교 각 13건, 영관급 5건 등 주로 초급간부 인사평정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군인을 직업으로 택한 피해자에게 장기복무 여부는 성범죄 무마를 위한 회유 도구로 쓰였다. 2017년 한 육군부대 주임원사는 ‘아빠라고 생각하라’며 소속 부대 부사관들을 추행했다가, 피해자들이 이를 신고하자 ‘장기도 되어야 하는데 주임원사를 탓하면 되겠냐’며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피해자들은 ‘장기복무에 악영향이 갈 수 있다’는 이유로 신고를 미루거나 참았다. 2017년 발생한 성폭행 사건 판결문을 보면 피해자는 “장기 선발, 진급 등 직업군인의 꿈을 펼치겠다”는 이유로 신고하지 않고 있다가, 가해자가 아무렇지 않은 듯 지속적으로 술자리 참석을 권유하자 참다못해 신고한 경우도 있다.
여군이 상급자라고 해도 군 성범죄에서 안전한 것도 아니었다. 하급자가 여성 상급자를 성적으로 모욕하거나 성폭행하는 사례도 9건(9.8%)이나 있었다. 남성-여성이라는 젠더 간 위계가 군에서 절대적인 계급적 위계를 압도한 사례들이다. 지난 2018년 한 의무병은 의식을 잃고 의무실에 실려 온 여성 상급자의 신체를 만져 준강제추행죄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특히 신병교육대에 막 입소한 훈련병들이 여성교관을 성적으로 모욕한 사례(6건)가 많았다. 지난해 7월 한 훈련병은 신병교육대대 개인화기 사격장에서 훈련에 관해 설명하는 한 여성교관을 향해 “계집년이 말이 많다”고 말했다가 상관모욕죄로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지난해 2월 논산훈련소에서 한 훈련병이 수류탄 훈련 중 여성교관 목소리를 흉내 내며 성적으로 모욕적인 발언을 해 역시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군사법원 처벌은 민간법원에 견줘 지나치게 무뎠다. 전체 판결 중 15건(16.4%)만이 실형이 선고됐다. 집행유예 53건(58.2%), 벌금형 15건(16.4%), 선고유예는 3건이었다. 실형율로만 따지면 성범죄로 기소된 민간인이 1심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는 비율(25.2%)보다 낮은 수치다.
솜방망이 처벌로 볼 수 있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2017년 고등군사법원은 식사 도중 여군의 목과 어깨, 허리 등을 주무른 한 군종장교에게 “개방된 식당에서 (추행이) 이뤄졌으며, 통상적인 허리 마사지로 보인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제3군단 보통군사법원은 2019년 10월 여군 숙소에 불법으로 침입하고, 트위터에서 알게 된 미성년 피해자의 나체사진을 유포한 군인에게 징역 2년의 집행유예(4년)를 선고했다. “집행유예 이상의 전과가 없고 범행 일체를 자백하고 반성한다”는 이유였다.
특히 군사법원은 형을 선고할 때 “수년간 성실한 군 복무를 해왔다”거나 “동료 부대원들이 탄원서를 제출했다”는 등의 이유를 감형 요소로 참작했다. 2019년 고등군사법원은 후배 여군을 자신의 방으로 유인한 뒤 성추행한 피고인에 대해 “피해자가 여전히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고” 있는 등 죄질이 좋지 않다면서도, “피고인의 지휘관을 비롯해 부대원들이 피고인의 선처를 간곡하게 탄원하고 있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직접적인 성범죄가 아니더라도 분석대상이 된 판결문 속에서는 여군을 성적으로 대상화는 시선이나, 남성 군인에 비해 업무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보는 인식이 여럿 발견됐다. 2016년 한 여성장교가 직속상관인 중령으로부터 “여군은 싫다” “여군은 유리할 때는 전우, 불리할 때는 여자”라는 등 성차별적 발언에 시달리다 부대를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2017년 “나는 여군 앞에만 서면 손이 떨려서 평가를 못 받겠다. 화생방 장교가 예뻐서 손이 떨린다”라고 말해놓고, 오히려 해당 여성장교를 고소한 이에게 무고죄 벌금형이 선고되기도 했다.
방혜린 군인권센터 간사는 “여성 군인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가 상급자와 하급자를 가리지 않고 빈번한 이유는 궁극적으로는 여성 군인을 동등한 동료로 보지 못하는 군내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여군에 대한 성범죄를 단순히 일부 남성 군인의 일탈로 취급할 것이 아니라, 군내 남성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 개선과 반성이 수반되어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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