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기억하는 법 [박영순의 커피 언어]
커피는 체리처럼 탐스러운 열매에 들어 있는 씨앗이다. 볶은 뒤 나타나는 쓴맛에 앞서 본질적으로 우리를 깊은 사유로 이끄는 좋은 향미들이 가득 담겨 있다. 커피비평가협회(CCA) 제공 |
어쩌다 맛본 기분 좋은 커피를 다시 만나려면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는 듯해야 한다.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 턱 밑의 점 하나까지’ 세세하게 그리는 심정으로 그 커피의 향미를 구체적으로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커피를 다시 만나거든, 그순간 커피가 부여하는 감성을 감각되는 속성으로 구체화해 기억에 새겨야 할 일이다.
커피 맛에 이름이 없는 탓에 나에게로 와 꽃이 되게 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무명(無名) 커피에 이름을 붙이려면, 커피를 마실 때 시간의 흐름을 따라 나의 관능에 감지되는 속성을 주욱 따라가며 일일이 소리내 말로 불러주는 게 좋다. 언어를 통해 이름표를 달 때 커피는 비로소 실체화한다.
커피를 머금으려 입에 대려는 순간, 코는 아로마(aroma)를 감지한다. 커피가 지닌 가장 가벼우면서도 살집이 있다고 할 정도로 볼륨감 있게 다가오는 물리적 감각이 향이다. 그 아로마가 머릿속에 솜사탕, 딸기잼, 패션프루츠 등 특정 속성을 지닌 사물을 이미지로 떠오르게 한다면 그 커피를 예컨대 패션프루츠라고 불러도 좋다.
입에 들어온 커피는 미각을 자극해 전기신호를 발생시키고, 그것은 다시 아로마가 자극한 후각의 전기신호와 어우러지면서 향미(flavor)가 된다.
커피가 입에 들어오거든 산미(acidity)부터 따질 일이다. 커피들은 정도와 질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두 신맛을 지니고 있다. 좋은 커피의 경우 단맛이 주변을 받쳐주는 덕분에 산미는 과일의 모습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입 안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감각되는 탓에 껄끄러움이나 이물감, 때론 마른 느낌과 같은 촉감이 초산이나 유기산과 같은 날카로움을 촉발시키기도 한다. 이로 인해 신김치나 시큼한 식초로 불린다면 커피에게 그만큼이나 불행한 이름은 없다.
다음으로 체성감각(somesthesis)의 결과물인 바디(body)가 인격처럼 커피에 고유의 가치를 부여하는 차례가 온다. 바디는 커피나 와인애호가들 사이에서 ‘보디’ 또는 ‘바디감’이라고 불리는데, 커피가 입안에서 끼치는 물리적인 느낌이 물에 가까운지, 우유에 가까운지를 표현하는 지표이다. 물에 가까우면 바디가 가볍다고 하고, 우유에 가까울수록 무겁고 부드럽다고 한다.
바디를 후각이나 미각보다 둔감한 것으로 보면 안 된다. 아로마와 향미, 산미가 유사한 수준의 커피인 경우에는 체성감각이 우열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단맛이 좋아도 꿀이나 잼을 연상케 하는 질감이 따르지 않는다면 밍밍하고 향미의 입체감도 떨어지게 된다. 촉감으로 인해 이런 뉘앙스를 주는 커피들은 최고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
마지막 속성이 커피를 삼킨 뒤 길게 이어지는 향미를 즐기는 여운(aftertaste)이다. 커피가 지닌 속성들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거나 단맛이 부족하면 여운은 짧아진다. 그렇게 되면 사유(思惟)가 단절된다. 좋은 커피는 우리를 행복에 빠져들게 하는 감성을 만들어낸다. 감성은 깊은 사유 속에서 만들어진다. 커피를 제대로 기억하려면 속성 너머에 있는 감성에 닿아야 한다. 그것은 그리운 사람을 거듭 사모하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처럼 소중하다. “입가의 미소까지 그렸지마는 마지막 한 가지 못 그린 것은 지금도 알 수 없는 당신의 마음”이라는 노랫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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