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배달한 우유 한 팩, 할아버지의 고독사를 막는다
지난 19일 오전 1시 서울 숭인동 독거 노인 집에 우유를 배달했다. 문 앞에 걸려 있는 보랭 가방에 남아 있는 게 없는지 확인하고 새 우유를 넣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180㎖ 우유 한 팩이 할아버지의 외로운 죽음을 막았다. 지난 2월 서울 성동구 금호4가의 그 할아버지 집 문 앞에는 보라색 보랭 가방이 걸려 있었다. 우유 주머니다. 가방 앞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다른 분께서 우유를 가져가시면 어르신의 안부를 확인할 수 없으며, 법적 책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매일 새벽, 우유 배달원은 이 가방에 우유를 넣으며 할아버지의 밤새 안녕을 묻는다. 보랭 가방이 비어 있으면, 이날 하루 무탈하게 우유를 꺼내 드셨다는 뜻. 우유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 위험 신호다. 배달원은 즉시 담당 주민센터에 알리고, 주민센터는 어르신 상태를 확인한다. 금호4가 할아버지가 그랬다. 전날 배달한 우유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본 배달원이 주민센터에 알렸다. 죽음까지 막을 순 없었지만, 죽음이 3일 이상 방치되는 일은 막았다. 통상 혼자 살던 사람이 가족·이웃·친구 간 왕래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사망하고 사흘 이상 방치되는 것을 '고독사(孤獨死)'라고 한다. 지난해 6월 부산의 한 주택에서는 1년 전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60대 남성이 백골 상태로 발견됐다. 이런 일은 우리 사회에서 해마다 늘고 있다. 아직 정확한 고독사 통계는 국내에 없다. 다만 '시신을 인수할 가족이나 지인이 없는 죽음'을 뜻하는 무연고사 통계로 짐작할 뿐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국내 무연고 사망자는 2013년 1271명에서 2018년 2549명으로 늘었다.
사단법인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 배달(우유 안부)'은 서울 16구에서 홀로 사는 노인 2000여 명에게 매일 180㎖ 우유 한 팩을 보내는 일을 한다. 이를 통해 어르신의 영양을 챙기고,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정서적 지지를 보내며, 고독사를 막는다. '아무튼, 주말'이 우유 배달 동행에 나섰다.
난코스 배달로 애먹는 일 많아
지난 19일 오전 0시 10분. 서울 성동구 성수이로 6길. 컴컴한 골목길 끝에 두 가게만 환하게 불을 밝혔다. 24시간 편의점과 매일우유 성동·광진 대리점이었다. 대리점에선 김태용(51) 점장이 한창 우유 상자를 배달차에 옮기는 중이었다. 이날 배달해야 하는 우유는 180㎖ 우유 240여 팩. 목적지는 서울 종로구 일대다.
종로구에도 매일유업 우유 대리점이 있지만, 배달은 성동·광진 지점에서 한다. 김 점장에게 이유를 물었다. "홀로 사는 노인이 사는 지역은 대부분 주택이고, 차로 진입하기 어려운 곳이 많아요. 내비게이션상으로는 200m 남았다는데, 실제로 보면 차로 더는 갈 수 없는 곳이에요. 주거 환경이 열악해, 반지하로 내려갔다가 그다음엔 옥탑으로 올라가기도 하죠."
그러다 보니 배달을 맡겠다는 곳이 없었다. 성동·광진 대리점에서 성동·광진·종로를 포함한 서울 지역 다섯 구의 우유 배달을 맡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새벽 배송 등으로 배달원이 많이 옮겨 가면서, 배달원이 많이 줄었다. 배달원을 못 구해, 김 점장이 직접 배달한다.
밤 12시 30분, 트렁크에 우유를 가득 실은 김 점장의 차가 출발했다. '아직도 서울에 이런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좁은 골목길과 경사진 언덕길이 이어졌다. 차가 막히지 않는 밤인데도, 첫 배달지인 종로구 숭인동 일대에 도착하니 20여 분이 지나 있었다.
차에서 내려 우유 두 팩을 손에 쥐고 김 점장의 뒤를 따라나섰다. 대문을 지나 계단 아래로 내려가니, 현관등도 없는 반지하 집이 나왔다. 휴대전화 손전등을 비춰 보라색 보랭 가방을 확인했다. 가방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우유 주인이 우유를 무사히 꺼내 마셨다는 이야기다. 김 점장은 "해마다 10가구 정도가 우유를 가져가지 않아, 이를 주민센터 등에 연계한다"며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을 때면 마음이 좋지 않다"고 했다. 빈 보랭 가방에 새 우유를 채워 넣었다.
다시 차를 타고 경사진 언덕길을 2~3분 달려 다음 집에 도착했다. 눈앞에 100여 계단이 펼쳐졌다. 차에서 내린 김 점장이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내려서 걸어야 합니다."
100여 계단을 올라 두 가구에 우유를 전달했다. 아파트처럼 편하게 주차하고, 한 번에 몇 가구씩 배달하는 '호사(?)'는 없었다. 김 점장은 "걸어야 하는 구간이 많아, 일반 가정 우유 배달보다 3배 이상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했다. 밤 12시 30분에 시작된 우유 배달은 오전 6시가 넘어서 끝나기 일쑤. 김 점장은 "돈 벌려고 한다면 절대 안 했을 것"이라며 "사회에 좋은 일 한다는 마음, 보람 때문에 한다"고 했다.
지난해 겨울, 연립주택 5층에 사는 할머니가 장갑과 함께 편지를 적어 김 점장에게 건넸다. '우유 아저씨. 날씨가 매우 차갑습니다. 약소하지만 따뜻하게 받아주세요.'
매일우유 성동·광진대리점에서 이날 배달할 우유를 분류해 차에 실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영양 보충'에서 '고독사 방지'로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 배달'은 2003년 서울 옥수중앙교회 호용한(63) 목사가 처음 시작했다. 지금이야 금호·옥수동 일대에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지만, 당시만 해도 주거 환경이 열악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운 이가 많았다. 호 목사가 지인의 후원을 받아 이 일대에서 홀로 사는 노인 100명에게 우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노인 1명에게 180㎖ 우유 한 팩을 한 달 동안 배달하는 데 드는 비용이 약 2만1000원. 호 목사의 지인이 3년간 이를 후원했고, 이후에는 교인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우유 값을 댔다.
'영양 보충' 목적이던 우유 배달에 '고독사 방지'라는 임무가 하나 더 붙은 건 2007년. 고독사가 사회문제로 크게 떠오르던 시점이었다. 호 목사가 근처 우유 대리점을 찾아가, 우유 값은 절대 미루지 않겠다며 대신 두 가지를 부탁했다. 첫째, 신선한 우유로 보내줄 것. 둘째, 바깥에 우유가 2개 이상 쌓이면 반드시 교회로 연락할 것.
교회의 선행이 알려지면서, 2012년 기업에서 정기 후원을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우아한 형제들(배달의 민족 운영사) 김봉진 대표였다. 호 목사는 "그 당시만 해도 배달의 민족은 적자를 내던 기업이라 후원을 받는 게 걱정도 됐다"며 "김봉진 대표가 '책임지고 하겠다'며 매달 꾸준히 500만원씩을 보내왔다"고 했다. 우유 배달 대상도 덩달아 250가구로 늘어났다. 그 이듬해에는 우아한 형제들에 투자하던 골드만삭스가 찾아왔다. 호 목사는 "자신들이 투자하는 우아한 형제들이 어떤 곳에 기부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며 "있는 그대로 우유 배달 얘기를 해주니, 본사로 돌아가 기부금 15만달러(약 1억8500만원)를 보내왔다"고 했다. 기부금이 늘어나면서, 2015년 호 목사는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후원금 관리를 위해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 배달' 사단법인을 설립했다. 이사장직을 맡게 됐지만, 호 목사가 법인을 통해 받는 급여는 0원. 직원은 회계를 담당하는 1명만 뒀다. 인건비를 아껴 최대한 많은 어르신에게 우유를 배달하기 위해서다.
2016년에는 매일유업이 후원을 시작하면서, '소화가 잘되는 우유'를 도입했다. 우리나라 어르신 중에는 우유를 먹고 배탈이나 설사를 한다는 사람이 많다. 유당 분해 효소인 '락타아제'가 없기 때문이다. 소화가 잘되는 우유는 유당을 제거한 우유로, 마셔도 속이 불편하지 않다. 매일유업은 지난 13일 '소화가 잘되는 우유' 제품의 매출 1%를 '우유 안부' 법인에 꾸준히 기부하겠다고 했다. 소화가 잘되는 우유의 작년 한 해 매출은 약 350억원으로, 매년 약 3억5000만원을 기부하는 셈이다.
이노레드, 텐마인즈 등 기업 16곳과 개인 기부자 500여 명도 꾸준히 우유 안부를 후원하고 있다.
고독사하는 어르신 사라질 때까지
서울 성동구 독서당로에서 혼자 사는 이정인(80)씨는 3년째 우유 안부를 받고 있다. 이씨는 "우유가 기력 보충에 확실히 도움이 되고, 특히 소화가 잘되는 우유라 속이 편하다"며 "우유를 받을 때마다 '누가 나를 이렇게 생각해주는구나' 이런 마음이 들어 너무 감사하다"고 했다.
우유 안부는 올해 배달 지역을 강서구, 양천구, 영등포구 등으로 더 넓힐 계획이다. 서울 20구 2600명이 이정인 할머니 같은 우유 안부를 받게 된다.
호 목사에게 우유 안부의 최종 목표를 물었다. 그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서울시를 다 덮고, 전국으로 가야지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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