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YANTHEME_dhcvz718
홈 > 커뮤니티 > 이슈
이슈

‘민주화 운동 거목’ 문동환 목사 별세

비트팟 0 881 0 0

한국 개신교계의 ‘큰 어른’인 문동환 목사가 지난 9일 오후 5시50분쯤 소천했다. 향년 98세.

대표적인 진보주의 신학자인 문동환 목사는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에 헌신하고, 우리 사회의 약자와 소외된 이들을 살핀 실천적 목회자였다. 한때 현실정치에 뛰어들기도 한 문 목사는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 개신교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문동환 목사 |연합뉴스
문 목사는 일제강점기이던 1921년 5월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독립신문’ 기자였던 부친 문재린 목사와 여성운동가였던 김신묵 여사의 3남2녀 중 차남이다. 늘봄 문익환 목사가 친형이다. 당시 명동촌은 독립운동이 활발했고, 민족의식이 유독 뜨거운 곳이자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였다. 형 문익환 목사, 윤동주 시인 등과 어린 시절을 보낸 고인은 특히 독립운동가·교육자인 김약연 목사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진보적이고 실천적인 목회자로서의 삶에 뜻을 두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일본 도쿄신학교에 유학한 고인은 해방 후 은사이자 진보적 신학자인 김재준 목사가 설립한 조선신학교(한신대 전신)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교사생활을 하던 그는 미국으로 유학, 웨스턴신학교 등에서 신학자의 길을 닦았다. 1961년 귀국한 뒤 한신대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개신교계 민주화운동의 한 거점인 수도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그해 12월 미국 유학 중 만난 헤리엇 페이 핀치백(문혜림) 여사와 결혼했다.

고인은 이승만에서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의 부조리함을 교수로서 목회자로서 여러 현장에서 설파했다. “아무리 교실에서 그럴 듯한 소리를 하고, 강단에서 감명 깊은 설교를 한다 해도 그의 생이 사람답지 못하면 자신과 남을 위해서 비참한 일이다.” 1972년 펴낸 저서 <자아확립> 서문에서 고인은 실천하는 삶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운동으로 투옥과 대학교 해직·복직이 이어지는 등 파란만장한 생활을 했다. 1976년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문’ 사건, 동일방직·와이에이치(YH) 노조 투쟁 지원 등으로 투옥을 반복했다. 앞서 1975년 유신정권 탄압으로 해직되고, 1979년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자 한신대에 복직했으나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다시 해직돼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미국에서도 목회자이자 민주투사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후 1986년 한신대를 정년퇴임한 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평화민주당에 입당, 평민연(평화민주통일연구회) 이사장을 지냈다. 1988년에는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해 평화민주당 수석부총재,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91년 부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실천적 목회자인 고인은 여유있는 노년을 보내지 않았다. “세계 도처에서 빈부격차를 조장하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신자유주의의 악랄한 횡포가 나를 가만히 있을 수 없게 했다. 세계 곳곳에서 유리방황하는 떠돌이들이 계속 늘고 있다. 그들의 아우성 소리가 만주에서 떠돌아다니는 동족을 보면서 아파하던 기억을, 박정희 독재 밑에서 신음하던 민중을 보면서 분노하던 기억을 지닌 내 마음에 다시 불을 질렀다.” <문동환 자서전-떠돌이 목자의 노래>에서 고인은 미국에서의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2013년 한국으로 돌아온 고인은 고국에서 밀려나 저임금 노동자로 팔려가는 이주노동자들 삶의 구조적 원인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라는 문제의식을 토대로 민중신학을 더욱 심화시켜 ‘이민자 신학’ ‘떠돌이 신학’ 연구에 매진했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보다 성장주의에 매몰된 한국 개신교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고인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선교사들은 ‘예수 믿고 천당 가라’는 이야기를 했지, 정의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한국에 상륙한 교회문화는 ‘예수를 믿으면 축복받고 천당 간다’는 현실 교회로 전락했다”며 “본래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0 Comments
제목

  메뉴
  고레벨 회원 랭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