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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의 성지 충무로... 가발가게가 성업이었던 이유는

보헤미안 0 157 0 0

지난달 24일 서울 충무로의 스카라가발 간판. 배우한 기자

유명 영화감독을 '충무로 대표 거장'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신인 배우를 '충무로 샛별'이라고 부를 만큼 서울 중구 충무로는 한국의 영화산업을 상징하는 지역이다. 지금은 비록 과거의 명성을 잇지 못하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들이 아직 남아 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영화배우들이 이용하던 미용실과 가발가게가 대표적이다. 입소문을 타면서 문화계 인사는 물론 정치인들까지 '탈모'라는 말 못 할 고민을 안고 있던 이들이 찾던 가발가게. 충무로역 6번 출구를 나와 을지로3가역 방향을 따라 걷다보면 보이는 '스카라가발'도 그중 한 곳이다.

지난달 24일의 서울 충무로 스카라가발 전경. 배우한 기자
 

'수출 효자품목' 덕에 '전 지구적 사업'까지

지난달 24일 스카라가발의 대표인 나유나씨가 가발 제작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배우한 기자

1960년대 이후 가발은 '대한민국 10대 수출 품목' 중 하나였다. 당시 가발은 우리나라 수출량의 10.8%를 차지했다. 전체 수출 품목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호황 산업이었다. 가발 수출만으로 1억 달러를 벌어들여 '세계 1위 가발 수출국'이라는 타이틀까지 얻었다.

스카라가발도 가발산업이 한창 번창하던 1975년 문을 열었다. 창업자인 황범자(68)씨는 1975년 결혼 직후 예물 등을 팔아 가게를 차렸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황씨는 손재주가 좋아 개업 초기 하루 300만 원가량 수익을 냈다. 당시 일반 직장인들의 한 달 월급이 3만 원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성공이었다. 황씨는 "현금이 너무 많아서 큰 가방에 현금을 담아 은행에 맡겨야 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사업이 번창하던 시절 스카라가발은 입소문을 타고 서울을 넘어 해외까지 유명세를 치렀다. 일본과 영국, 독일, 캐나다에 이민 갔던 사람들이 귀국 때 스카라가발을 찾았고, 전화주문도 적지 않았다. 국내에서도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손님들이 스카라가발을 찾았다. 서울 이외 지역에서 온 손님들이 40%를 차지할 정도였다.

스카라가발 매장 내부에 비치돼 있는 유명인들의 사인본. 배우한 기자

스카라가발 매장 한쪽 벽면에는 소개 기사와 단골 연예인들의 오래된 사인이 비치돼 있다. 가수 설운도도 단골이었다. 설운도처럼 가발 착용 사실을 떳떳하게 알린 연예인은 많지 않았다. 착용 사실을 밝히기 꺼린 연예인 대부분은 선글라스를 끼고 급하게 가발을 맞추고 빠져 나갔다는 게 황 대표의 설명이다. 개업 초기 영화배우들이 주로 이용했지만, 이후에는 정치인과 뒷머리를 올려야 하는 영부인까지 스카라가발을 찾았다고 한다.

스카라가발 매장 내부에 비치돼 있는 옛날 신문 기사 스크랩. 배우한 기자
 

90년대부터 대기업 진출로 위기였지만 관리비 무료로 단골 유지

지난달 24일 서울 충무로 스카라가발 매장 내부에 가발들이 전시돼 있다. 배우한 기자

가발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든 것은 1990년대부터다. 가격이 저렴한 수입 제품이 들어오고, 대량 생산이 가능한 업체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스카라가발도 고비를 맞았다. 하지만 단골 고객들은 스카라가발이 아직도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잘나가던 시절보다 줄긴 했지만 여전히 찾아오는 단골이 있다. 개업 초기 20대 군인들이 극장을 이용하기 위해 가발을 구입했다면, 이제는 2030세대 탈모를 겪는 손님들이 많이 찾는다고 귀띔했다. 황씨 기억에 가장 남는 손님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다. 황씨는 가발을 맞춘 이 여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신문에 부고 기사가 난 것을 보고 '아 가발이 임자를 잃었구나' 싶었는데, 일주일쯤 후에 나이 많은 비서가 와 '태워드리겠다'며 가져갔다"고 말했다.

단골과 함께 45년간 명맥을 잇게 한 힘은 맞춤형 제작과 철저한 사후관리다. 스카라가발에서는 고객과의 일 대 일 맞춤 상담을 통해 최적화한 가발을 직접 만든다. 한 번 구입하면 5, 6년 정도 사용할 수 있고, 애프터서비스(AS)도 평생 무료다. 황씨는 "대기업에서 사용하는 나일론 실 같은 인모는 저렴한 대신 수명이 짧다"며 "그런 제품을 이용하다 자주 교체해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우리 가게를 찾는 손님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대규모 업체에서 가발을 구입하면 관리비를 포함해 300만 원 이상 들지만, 스카라가발에서는 그 절반에 구입이 가능하다.

가발 제작 기술을 둘러싼 신경전도 한때 치열했다고 한다. 스카라가발을 찾아 여러가지 문의를 했던 한 손님은, 나중에 자신이 직접 가발 가게를 차렸다. 황씨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대규모 업체 가맹점에서 가발 제작을 해보고, 일본의 유명 기업에 견학까지 다녀왔다.

지난달 24일 나씨가 가발 제작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배우한 기자
 

서울미래유산으로 채택… 하지만 "승계자 없어서 속상해"

스카라가발 매장 입구 쪽에 서울미래유산 상표가 붙어 있다. 배우한 기자

스카라가발의 오래된 문을 열고 가면 문 옆에 붙어 있는 '서울미래유산' 큰 상표가 눈에 띈다. 지난해 서울시가 '1970년대 한국의 대표수출 상품이었던 가발제조업을 오늘날까지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울미래유산의 가치를 지닌다'며 지정한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다른 가발가게도 있지만 대중성과 인지도를 바탕으로 서울미래유산을 지정했다"며 "여전히 단골들에게는 인기인 점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황씨의 딸인 나유나씨가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아쉽게도 아직까지 승계자가 보이지 않고 있다. 아무래도 가발 사업이 사양산업인 탓이 크다. 나씨가 어렸을 때만 해도 가게 직원이 3명이 넘을 정도로 북적북적했다. 당시 27세까지만 해도 가발 기술을 거부하던 나씨였지만 가발과 바늘을 손에 쥐여주면 남들이 며칠 걸릴 기술을 하루 만에 뚝딱해내던 그였다.

황씨는 가발을 '몸의 일부'라고 정의 내렸다. 머리 관리를 잘 못하면 '미용실 언 니'에게 야단 맞듯 가발 관리를 잘 못하면 AS 방문 시 황씨에게 야단 맞을 수 있다고 한다. '신체의 일부'이기에 황씨는 승계자가 없어서 더욱 속상하다. 그는 "어쩔 수 없다"며 "시대가 달라지니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도 한숨을 크게 쉬었다.

신체의 일부를 만들어주기 때문에 고객들이 자연스럽게 가발을 받아들이고 제품에 만족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는 황씨와 나씨. 한때는 우리나라를 일으켜준 산업이고, 또 탈모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에 이제는 고객들이 당당히 액세서리처럼 가발을 사갔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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