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문 논란, 치어리더와 벤치 자키의 윤리학
아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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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4 14:48
-키움 히어로즈 송성문, 1차전 끝난 뒤 올라온 영상으로 곤욕
-상대 선수 향해 ‘벤치 자킹’ 행위…과격한 발언 내용에 팬들 비난 쏟아져
-프로야구 초창기부터 내려온 벤치 자키, 모든 게 다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선수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공개되는 시대…“어디에나 함정이 있다”
키움 히어로즈 송성문은 한국시리즈 1차전이 끝난 뒤 생애 처음 실시간 검색어 1위의 주인공이 됐다(사진=엠스플뉴스)
키움 히어로즈와 두산 베어스의 한국시리즈 2차전을 앞둔 10월 23일 잠실야구장. 키움 더그아웃 앞에 수십 명의 취재진이 몰렸다. 지상파 방송 카메라부터 종이신문까지 다양한 매체가 3루 더그아웃으로 총집결했다. 마치 고위공직자의 검찰 포토라인 등장을 기다리는 풍경처럼 보였다.
잠시 후 등장한 인물은, 공직자도 공직자 아내도 아닌 키움 내야수 송성문이었다. 평소의 싱글벙글 웃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카메라 앞에 섰다.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고,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제가 어제 한 행동에 대해서 정말 많이 반성하고 있다. KBO리그를 사랑해주시는 팬 여러분께 실망을 드린 점에 대해서 정말 죄송하고, 반성한다.”
송성문의 과격 발언, 치어리더보단 ‘벤치 자키’에 가까웠다
더그아웃 앞 포토라인에 선 송성문. 목소리는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사진=엠스플뉴스)
송성문이 죄인이 된 건, 전날 1차전 경기가 끝난 뒤 올라온 한 영상 때문이었다.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영상에서 송성문은 ‘저세상 텐션’으로 쉴 새 없이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끄고 보면, 더그아웃 분위기를 띄우는 열정적 치어리더처럼 보였다.
하지만 발언 내용은 달랐다. 꽤 거칠었다. 상대 포수를 향해 ‘자동문’이라고 야유했고, 상대 투수를 향해선 ‘팔꿈치 인대 나갔다’고 했다. 그 투수의 부상 전력을 언급한 것이다. 특히 경기중 쓰러진 선수를 향해 ‘햄스트링’ ‘재활 2년’이라고 말하는 듯한 대목이 크게 논란이 됐다. 치어리더보단 벤치 자키(Bench Jockey)에 가까웠다.
'벤치 자키'는 상대를 야유하는 선수, 감독을 가리키는 야구 은어다. 스포츠 작가 로스 번스타인의 책 ‘더 코드’에 따르면 벤치에서 하는 이런 도발과 여유는 프로야구 탄생 초기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전통이다.
책에서 번스타인은 “상대를 화나게 하거나 주의를 산만하게 만들어 집중력을 깨는 게 목적이다. 벤치 자킹엔 가벼운 욕이나 야유부터 인종차별, 종교, 가족에 대한 공격까지 심한 것도 있다”고 썼다.
KBO리그에서도 벤치 자킹은 역사가 깊다. 여러 선수와 코치, 전직 선수가 야구장에서 상대 야유와 도발은 아주 흔한 일이라고 말한다. 상대를 가리지도 않는다. 1984년 OB 베어스(두산의 전신) 포수 배원영은 삼성 라이온즈 김영덕 감독이 제일 싫어하던 별명(변태)을 계속 외치다, 김 감독에게 뺨을 맞았다. 그해 OB와 삼성은 시즌 내내 난투극을 펼쳤고, 이렇게 쌓인 악감정은 희대의 ‘져주기 게임’ 사태로 이어졌다.
한 코치는 “송성문 영상을 봤다. 더그아웃에 있으면 종종 보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친한 선수를 놀리기도 하고, 모르는 외부인이 보기엔 도가 지나치다 싶은 말도 오간다. 솔직히 선수들 사이에서 이걸 갖고 문제 삼는 경우는 드물다. 선수들만의 세계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두산 김태형 감독도 2차전을 앞두고 “선수들끼리 하는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단 반응을 보였다.
물론 선수들만의 문화라고 해도 모든 게 어느 시대에나 다 허용되는 건 아니다. 로스 번스타인은 더 코드에서 “한때는 흑인, 히스패닉, 유대인 선수에 대한 인종차별성 야유가 많았다. 하지만 야구계는 이를 인종차별 문제로 인식하는 대신 경기의 일부분으로 여겼다”며 “레오 듀로셔 같은 감독은 상대 선수들을 향해 검둥이, 숯덩이 같은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을 매일 내뱉었다”고 썼다.
시대가 바뀐 지금은 저런 발언을 하는 선수는 야구장은 물론 사회에서도 살아남기 어렵다. 또 '선수들만의 세계'라고 해도 분명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존재한다. 두산 선수들이 송성문 동영상을 보고 불쾌하단 반응을 보인 것도 민감한 부상 언급 때문이었다.
몇 해전까지 고교야구 학생선수들은 더그아웃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상대팀에 야유를 보내곤 했다(사진 위). 그러나 지금은 사진 아래처럼 더그아웃 난간에 기대는 일이 거의 사라졌다(사진=엠스플뉴스)
한 아마야구 관계자는 “요새는 고교 선수들도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고교야구 대회에서 선수들이 더그아웃 난간에 매달려 상대 팀에 야유와 조롱을 퍼붓고, 그라운드로 뛰쳐나와 춤을 추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최근엔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의 제재 강화로 벤치 자킹 행위를 자제하는 분위기다.
이 관계자는 “상대팀을 조롱하고, 부상을 기원한다고 팀 동료들이 힘을 받나? 팀원들에게 힘을 주는 말과, 상대를 저주하는 말은 전혀 다르다”며 “벤치 자키 역할을 하더라도 ‘저 선수 공 칠 만하다’ ‘별거 아니다’ 정도 수준으로 하면 문제가 없다. 부상을 언급하는 건 선을 넘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디에나 함정이 있다. 촬영한다는 사실을 알면, 주의하는 수밖에 없다”
한국시리즈 1차전, 동점타를 치고 환호하는 송성문(사진=키움)
야구인 사이에선 선수들만의 공간이 계속 외부에 노출되고, 선수들만의 룰이 여론에 의해 침해받는 것에 우려를 표하는 의견도 나온다. 옛날 프로야구에선 선수들만의 공간은 외부에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중계방송 카메라는 그라운드와 마운드, 타석만 비췄다.
이제는 중계방송이 그라운드는 물론 더그아웃 안을 수시로 비춘다. 그것도 HD 화질로. 팬들도 단순히 던지고 치는 경기 장면 외에 더 많은 것을 보고 알기 원한다. 선수가 뭘 입고 출근하는지, 무슨 차를 타는지, 선수들끼리 더그아웃에서 어떤 얘길 주고받는지, 즐겨 하는 행동이 무엇인지, 선수의 땀구멍 개수까지 속속 알기 원한다. 구단마다 운영하는 자체 영상 채널이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는 역할을 한다.
선수들끼리 하는 말과 행동은 외부인의 시각으로 보면 이상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것도 많다. ‘징크스’만 해도 야구를 안 해본 사람의 눈으로 보면 괴상한 것 투성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경기장 밖의 룰을 갖고 경기장 안의 룰을 문제 삼는 일이 잦아졌다. SNS와 커뮤니티가 논란을 만들고, 일부 매체가 이를 확대 재생산한다. 나중엔 여론이 경기장 안의 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과거 프로야구 투수들은 몸에 맞는 볼을 던져도 사과하지 않았다. 투수가 몸쪽 승부를 하려면 몸에 맞는 볼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는 게 이유였다. 투수도 알고, 타자도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타자를 맞추면 투수를 향한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과를 하지 않거나, 사과한 모습이 중계화면에 잡히지 않으면 인성에 문제 있는 투수로 찍히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 결과, 몸에 맞는 볼을 던진 투수가 사과하는, 세계 어느 나라 야구에도 없는 코드가 탄생했다.
송성문 논란도 포털사이트에 영상이 올라가지 않았다면,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갔을 일이다. 두산 선수들도 알지 못하고 지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한 매체가 무단으로 이를 공개하면서 외부에 알려졌고, 논란이 커졌고, 실시간 검색어 1위까지 올랐다.
두산 한 베테랑 선수가 송성문의 발언보다 이를 공개한 행위를 더 문제 삼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선수는 “그걸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올렸는지 모르겠다. 정상적인 사고력이 있으면, 영상을 올리면 문제가 될 거란 생각을 했을 법도 한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선수들만의 세계가 지금처럼 무차별적으로 외부에 공개되다 보면, 나중엔 또 다른 누군가가 송성문처럼 비난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우려의 표현이다. 선수들끼리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외부의 시각으로 단죄받고, 심각한 논란이 되고, 인성에 문제있는 선수로 찍히고, 취재진 앞에서 공개사과하는 사태가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다. 어떤 면에서 선수들에게 ‘송성문 사태’는 남의 얘기가 아니다. 언젠가는 내 일이 될 수도 있는 문제다.
‘더 코드’에선 레오 듀로셔 감독이 어느 날 팀 내 흑인 선수들을 모아놓고 한 얘기를 소개했다. “오늘 경기 중에 상대 흑인 선수들에게 욕설을 내뱉을 거다. 하지만 진심이 아니란 걸 이해해줬으면 한다. 그들의 속을 뒤집어 놓기 위한 쇼일 뿐이니, 오해가 없길 바란다”고 양해를 구했단 것이다. 물론 지금 시대엔 결코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송성문의 격한 발언도 진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송글벙글’이란 별명처럼, 항상 웃는 얼굴로 유쾌한 에너지를 주위에 전하던 선수다. 키움의 한 선수는 ‘경기에 몰입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선을 넘은 것 같다’고 감쌌다. 두산 김재호도 경기가 끝난 뒤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해야 성숙해진다. 야유를 이겨내야 더 큰 선수, 후배들에게 한마디씩 해줄 수 있는 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와 격려의 말을 건넸다.
야구선수로 살기 쉽지 않은 시대다. 어쩌면 키움 주장 김상수의 말이 정답일지 모른다. 김상수는 ‘더그아웃 안이 외부에 노출된 게 속상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어디에나 함정은 있다고 생각한다. 촬영하고 있다는 걸 알면, 선수들이 주의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모든 게 속속들이 공개되는 시대, 선수들이 살아남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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