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번 안 따지는 상무 야구단 전통, 시작은 '장효조의 난'
장효조(1956~2011)
훈련소 면제·고액 훈련비 제공 등
파격 조건으로 육군 야구부 입단
제대 후 만 27세에 삼성서 데뷔
교타자 대명사답게 첫해 마무리
타격·최다안타·출루율 1위 올라
홈런도 18개나 쳐내며 3위에삼성라이온즈 제공지프 안에는 장교와 사병 한 명이 타고 있었다. 5공 군사정권이 막 출범한 무렵. 군인들의 위세가 등등하던 시절이었다. 지프를 타고 어디론가 끌려갔다. 이태원의 육군경리단(1969년부터 이곳에 위치. 현재 다른 이름으로 바뀌었고 장소도 옮겨갔으나 여전히 경리단길이라는 명칭은 남아 있음)이었다.
경리단장인 모 대령을 만났다. 그는 대뜸 육군 야구부에 입단하라고 요구했다. 당시 육군 야구부는 경리단 소속이었다. 김재박을 앞세운 성무(공군)와의 경쟁의식이 대단했다. 당시 5공 실세들은 모두 육군. 무엇을 하더라도 공군이나 해군에게 이겨야 했다. 하물며 인기 스포츠인 야구는 말할 나위 없었다.
내일 공군 야구부에 입대해야 하는데. 아무리 사정해봤자 저쪽은 철벽이었다. 모든 법적 문제는 자신들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니 아무 토 달지 말고 육군으로 오라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약속을 했는데. 장효조의 입에서 선뜻 응낙이 떨어지지 않자 경리단장은 놀라운 조건을 제시했다.
훈련소 면제에 월 100만원 훈련비 지급. 100만원이면 당시 웬만한 대기업 임원 월급이었다. 게다가 훈련소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무엇보다 끝까지 거부하면 곱게 그곳에서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장효조는 다음날 육군 야구부에 입단했다. 대구상고와 한양대 2년 후배 김시진이 선임으로 있었다. 김시진은 1981년 대학을 졸업한 후 팔꿈치 부상 전력으로 실업팀에서 합당한 대우를 꺼리자 육군에 입대했다.
당시 육군 야구부는 야구 선후배가 아닌 군번 순으로 내무반(생활관) 서열을 정했다. 비록 밖에서 야구 선배라 할지라도 늦게 들어오면 육군 야구부 안에선 후임으로 전락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입대한 김시진은 중학교 후배인 선임에게 군기 잡혀 꽤 어려움을 겪었다. 이제 좀 선임 대접을 받을까 했는데 '천하의' 장효조가 들어왔다.
장효조는 첫날 묵묵히 선임들의 군기 교육을 받아 들였다. 다음날 육군 야구부가 발칵 뒤집혔다. 지금까지 내려오던 군번 우선은 사라지고, 야구 선후배 우선 세상으로 천지개벽했다. 이른바 육군 야구부 '장효조의 난'이다. 어차피 제대하면 다시 만나야 할 사이들. 졸지에 김시진은 다시 맨 아래 후임으로 강등됐다.
당시 육군 야구부는 대학을 졸업한 후 2~3년간 실업야구에서 활약하다 입대한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하나 같이 김시진보다는 선배들. 이때 세워진 전통은 지금까지 상무 야구단에 그대로 남아 있다. 새로 들어온 신입은 첫날 신고식을 한 후 다음날부터 야구 선후배 서열을 따르게 된다.
장효조는 1982년 말 제대와 함께 프로야구 삼성에 입단했다. 이듬해 만 27세의 늦깎이 나이에 신인으로 데뷔했다. 첫해 장효조는 타격 1위(0.369), 최다안타 1위(117개), 장타율(0.618)과 출루율(0.469) 각각 1위에 올랐다. 장효조가 치지 않으면 볼이라는 말도 들었다.
놀라운 것은 홈런 3위(18개)에 오른 것. 장효조는 프로 입단 전 손목 강화 운동을 많이 했다. 나무배트는 알루미늄과 달라서 끝이 무겁다. 손목 힘이 강해야 배트를 잘 돌린다. 장효조는 5월 14일 OB(현 두산) 장선두의 공을 때려 담장을 넘겼다. 이튿날 강철원으로부터 연타석 홈런을 얻어냈다. 3연타석 홈런이었다. 장효조는 벤치프레스 100㎏을 들어올렸다. 당시 삼성 선수 가운데 이만수와 함께 두 사람만 이 무게를 감당했다. 교타자로 알고 있지만 사실 장효조는 홈런타자였다.
texan509@fnnews.com 성일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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