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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의 KCC, 아직 한 척의 배가 남아있다

그래그래 0 439 0 0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사옵니다.’ 소설 ‘징비록’, 영화 ‘명량’ 등을 통해 더욱 유명해진 이순신 장군의 명대사다. 절망에 가까울 정도로 앞이 보이는 않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투지를 잃지 않고 맞서 싸우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이순신 장군은 최악의 조건에서도 군대를 재정비해 대반격에 성공했다.


전주 KCC는 KBL 무대에서 많은 시간 동안 무적함대로 이름을 떨쳤다. 바닥까지 성적이 고꾸라졌던 시기도 있었지만 슬럼프는 길지 않았고 이조추 시절, 신강하 시절 등에 걸쳐 명문의 위용을 과시했다. 허재 감독 시절 이후 더 이상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추가하지 못하고 주춤하고 있지만 지난 시즌 정규리그 우승, 챔피언결정전 진출 등을 만들어내며 반격의 기틀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시즌 KCC팬들의 기대는 높지 않았다. 지난 시즌 성적을 봤을 때 당연히 우승을 정조준해야 맞는 것이지만 객관적 전력에서 경쟁 팀들에게 밀렸기 때문이다. 불균형한 포지션별 밸런스, 얇은 벤치 등 여러 약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지난 시즌 예상 밖 성적을 올렸던 데에는 시즌 중반까지 골 밑을 지켜준 타일러 데이비스(24·208㎝)와 전창진 감독 특유의 용병술 덕이 컸다.


현재 KCC는 거대한 풍랑을 만난 상태다. 개막 3연패로 불안한 출발을 보였던 것도 잠시 이내 힘을 내며 4연승에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큰일이 연달아 터졌다. 팀전력의 중심축 정창영(33‧193㎝)과 송교창(25·201cm)이 각각 갈비뼈, 손가락 부상으로 빠지게 된 것이다. 팀 내 살림꾼, 에이스를 맡고 있던 선수들이라는 점에서 치명타가 크다. 송교창같은 경우 수술 후 재활까지 감안하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다.


KCC 입장에서 두 선수의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지난 시즌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 송교창은 말 그대로 간판스타이며 정창영은 팀내 몇 안되는 공수겸장 선수였다. ‘마음을 비우는 리빌딩 시즌이 될 것 같다’는 말까지 나온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CC는 4승 4패로 중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시즌 초임을 감안 했을 때 연승 모드만 타게 된다면 선두권 경쟁도 가능해 보인다.


물론 쉽지 않다. 4연승을 했던 배경에는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는 말처럼 남은 선수들이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뛰어준 영향이 크다. 활약도가 저조했던 선수들도 제 몫을 해줬다. 이러한 활약이 정규리그에서 계속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KCC가 예상 밖 성적을 거두고 있는 데에는 계산된 부분이 아닌 이른바 변수가 상당한 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변수가 변수인 이유는 자주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변수만 기대하기에는 앞으로 남은 경기가 너무 많다.


살림꾼 정창영과 신형돌격선 송교창이 빠진 이지스 함대지만 아직까지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투지는 꺾이지 않았고 외려 한번 해보자는 기세가 불타오르고 있다. 아직 중심이 되어줄 한 척의 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전장을 누비며 공을 세웠던 베테랑 이정현(34·191㎝)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이정현은 BQ가 매우 높다고 극찬받아온 전천후 공격수다. 내외곽을 오가며 득점을 올리는 것을 비롯 센스가 빼어나고 시야까지 넓다. 조금의 빈틈만 보이면 과감하게 돌파를 시도해 득점을 올리거나 자유투를 얻어내는 것은 물론 돌파하는 척하다가 순간적으로 멈춰 서서 쏘는 미들슛, 뱅크슛도 일품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강해 클러치타임에서 수시로 터프샷을 집어넣는 강심장의 소유자다.


거기에 '오프 더 볼 무브'가 워낙 좋아 받아먹는 플레이에도 능하다. 자신이 공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도 끊임없이 빈 공간을 찾아 움직이며 슈터 혹은 속공수의 역할도 잘해준다. 더불어 2대 2 플레이까지 좋은지라 상대하는 수비 입장에서는 매우 골치가 아프다. 상황에 따라 자신이 어떻게 플레이해야 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고 이를 몸소 실천할 수 있는 이른바 농구 마스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시즌을 앞두고 팬들 사이에서 이정현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다. 긴 시간 동안 국내 최고의 2번으로 명성을 떨쳐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적지 않은 나이로 인해 노쇠화 기미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 그 이유다. 지난 시즌 54경기를 소화하며 올린 평균 11.6득점, 2.4리바운드, 3.4어시스트. 1.1스틸은 기록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다. 하지만 공격 횟수에 비해 성공률이 떨어졌고 경기마다 기복이 심해 잘 되는날 몰아치기로 만들어낸 부분이 컸다.


특히 활동량, 순발력 등이 현격히 떨어진 상태인지라 수비에서 아쉬운 모습을 자주 드러내며 빈축을 샀다. 전체적으로 개인 디펜스가 떨어진다는 혹평을 받고 있는 KCC에서 유현준과 함께 앞선 수비 구멍으로 지적받기도 했다. 예전의 해결사 이미지에서 한물간 노장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전성기는 지났을지 모르지만 이정현은 여전히 이정현이었다. 지난 시즌보다 나이는 한 살 더 먹었지만 외려 몸 상태는 더 낫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평균 15.1득점, 2.5리바운드, 3.3어시스트로 펄펄 날고 있다.


아직 8경기밖에 치르지 않았다는 말로 폄하하기에는 플레이 내용도 좋다. 25득점, 4어시스트로 펄펄 날았던 15일 SK전에서는 고비마다 해결사 역할을 하며 팀에 올 시즌 첫승을 안겼다. 3점차로 끌려가던 4쿼터 막판 3점슛을 터트려 동점을 만들고 다음 수비에서 김선형의 슛을 블록해 버리는 장면은 잠들어있던 KCC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후문이다.


22일 대구 한국가스공사와의 경기에서는 송교창이 부상으로 들것에 실려 나가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끝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은 채 팀원들을 다독였으며 결승 자유투까지 성공시키며 68-67신승을 이끌었다. 이정현의 존재가 없었으면 KCC는 심각한 연패의 늪에 빠졌을지도 모를일이다.


이정현의 가치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도 크다. 팀 내 캡틴으로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잘해주고 있는데 그런만큼 동료들의 믿음도 두터운 편이다. 그가 중심을 잘 잡아주고 있기에 김지완 등 다른 선수들이 부진을 털고 경기력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는 평가다. 모진 풍랑을 만난 이지스 함대지만 팀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정현이라는 한 척의 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글 / 김종수 객원기자
 

#사진 / 유용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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