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인으로 돌아간 박종팔 챔프와 아마복서 김석호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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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인으로 돌아간 박종팔 챔프와 아마복서 김석호의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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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 소속의 최고 유망주 김석호 선수

[조영섭의 복싱스토리] 지난 주말 필자는 중화동에서 복싱 체육관을 운영하는 조억기 관장과 함께 불악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남양주시에 위치한 박종팔의 자택으로 향했다. 박종팔은 흘러간 전설의 복서들 중 가장 편하게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복서 중 한분이다. 

가끔씩 그를 만나기 위해 한걸음씩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유안진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글이 뇌리를 스쳐간다. 비오는 날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란 글의 내용에서 유추 할 수 있듯이 아무 때나 찾아가도 친구같은 편안한 선배가 바로 전 IBF.WBA 슈퍼 미들급 챔피언 박종팔이다. 

그는 1989년 화려한 현역생활을 청산하면서 불운의 서곡이 울려 퍼진다. 벌이는 사업마다 낭패를 거듭하며 세찬 풍파에 휘말려 허우적거렸다. 거울 앞에 선 내 누님처럼 생긴 지금의 아내 이정희 여사를 만나던 2008년 전까지 20년간 험난한 삶이 지속된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현역시절 52전 46승(39KO승)5패1무를 기록하며 2차례 세계 정상에 올라 돈도 엄청 벌어보았고 은퇴 후 수십억을 사기당해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할 정도로 인생의 막다른 골목까지 치달으며 냉탕과 온탕을 오갔던 그의 진중한 말투엔 철학이 담겨 있다. 박종팔이 제일 먼저 지적한 게 복싱인의 화합 이었다. 복싱인은 두 사람이 모이면 서로 돕지만 세 사람이면 서로 견제한다. 홀수가 되면서 바로 분열과 반목 그리고 다툼이 시작된다고 그는 말한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임진왜란, 병자호란, 신미양호를 비롯해 수많은 외침(外侵)을 당하면서도 주변국이 어떻게 변하는지 경계조차 없이 오직 밥그릇 싸움만 하다가 나라를 말아먹은 부끄러운 역사가 반복된 것도 사분오열이었다. 

불암산에서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박종팔

두 번째로 그는 욕심을 버리고 건강한 삶을 사는게 인생 3막의 핵심이라 말한다. 문득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에 나온 주인공 농부 이야기가 생각 난다. 농부는 그가 가는 곳만큼 땅을 주겠다는 솔깃한 제안을 받는다. 단 해지기 전까지는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야 했다. 농부는 열심히 걸었다. 심장이 터질 듯 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던 농부는 결국 출발 지점에 도착했지만 숨을 거둔다는 내용이다. '조금만 더'라는 마음을 스스로 제어하기가 힘든게 인간의 본성인이기에  마음을 내려 놓기가 쉽지 않을성 싶다.

필자는 박종팔의 위대한 점은 두 차례 세계정상을 정복한 것도 아니고 15차례 동양 타이틀을 연속 KO승으로 방어에 성공 한 것도 더더욱 아니고 미국원정 27연패의 사슬을 끊은, 1986년 4월 비니 커토를 15회 KO로 이긴 경기도 물론 아니다. 필자는 그가 쓰러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 정상정복에 성공한 감투정신 때문이다. 1978년 6월 14일 박종팔은 5전째 강흥원과 벌인 국내 미들급 타이틀전에서 1회 KO패 당한다, 그날 박종팔은 분을 싹이지 못하고 비가 추적추적 내린 그날 장충체육관에서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노량진 동아체육관까지 걸어간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그 경기후 박종팔은 19연속 KO 퍼레이드를 펼치며 한국 복싱의 아이콘으로 우뚝선다. 하지만 방심 끝에 치러진 1983년 5월 29일 라경민과 동양타이틀 16차 방어전에서 7회 KO패 당하며 벨트를 풀자 이제 '박종팔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언론에서 요란한 함포 사격을 가했고 그럼에도 박종팔은 보란 듯이 그해 9월 라경민에 4회 KO승 설욕에 성공했다. 이후 17연승(12KO승)을 거두며 세계 정상에 두차례 올랐고 통산 9차방어에 성공해 만개한 기량을 선보였다.

박종팔 챔프와 조억기 관장(우)

그날 박종팔과의 취재를 마치고 곧바로 대조적인 이력을 지닌 서울체고 상무소속의 전직복서 김석호를 조억기 관장과 함께 중화체육관에서 만났다, 호탕한 성격의 김석호는 복싱계의 명장 이흥수 서울체고 감독이 정해명, 나학균, 전병성, 조동범, 한광형, 김석현, 정경준, 김범수 등 기라성 같은 복서들을 조련해 학원스포츠를 평정하던 1985년 그때 그 시절 공수주 3박자를 갖춘 서울체고 최고의 에이스였다.

장안중 재학시절 이미 밴텀급에서 전국대회 3관왕을 달성한 김석호는 서울체고 1, 2학년때 전국대회 페더급 4관왕을 달성한 천재복서였다. 하지만 1987년 라이트급으로 출전한 루마니아 세계청소년대회 선발전에서 당시 군산 제일고 3학년 전진철에게 석연찮게 판정으로 패했고 자존심이 상한 김석호는 일순간 복싱을 접는다, 국가대표급 실력을 보유한 김석호는 포기하는데도 국가대표급 복서였던 것이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안타깝게 생각한 주변의 권유에 의해 전열을 정비한 후 용인군청에 입단한 김석호는 대표선발전에서 1886년 아시안게임 페더급 금메달 리스트인 박형옥(여주군청)을 날카로운 카운터로 압도하며 판정으로 잡아내면서 부활에 성공한 후 1988년 상무에 입대해 그해 4월 16일 김윤석과 프로 데뷔전을 치러 3회 KO승을 거둔 후 1989년 9월까지 1년 5개월 동안 7전 7승(6KO승)을 기록하며 최고 유망주 반열에 오른다. 그 중 1988년 12월에 제15회 MBC 신인왕전 최우수복서 출신 유근천(일화체)과 맞붙어 한 수 위의 월등한 기량으로 압도적인 화력을 쏟아내며 거둔 5회 KO승은 탄성이 절로 나오는 경기였다. 하지만 김석호의 복싱은 거기까지였다. 만 22세에 한창 나이에 복싱과 연을 완전히 끊어버린 것이다 

80대 중반 서울체고 최고 유망주 김석호

2001년 오사카에서 벌어진 동아시아 대회에서 11체급의 국가대표 선수들을 이끌어 금메달 4개, 은메달 4개, 동메달 3개 등 전 체급에서 메달을 획득하며 금자탑을 이룩한 복싱계의 명장 이흥수 전 상무감독은 본인의 30년 지도자 생활 중 가장 복싱 스킬이 뛰어난 복서가 단연 김석호라고 서문을 연 후 그녀석은 치타처럼 빠른 동체시력만큼 포기 하는 것도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빠른 복서라고 일갈하면서 그가 복싱을 지속적으로 했다면 적어도 1990년 북경 아시안 게임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국위선양할 수 있는 재목감이었다고 말한다. 

야구에서 제어 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구는 포수의 미트에 들어가지 않는 한 그저 기네스북에 등재 될 순 있어도 명예의 전당에 오르지 않듯이 5차례나 패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싸운 박종팔 은 2012년 하와이에서 개최된 IBF 총회에서 IBF 30년을 빛낸 인물로 선정되어 특별상을 수상하며 국위를 선양했지만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져 세인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뿐 이정표와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앞으로 남은 날 두 복서의 건승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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