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은 왜 자신을 인종차별주의자라 불렀나
NBA는 1946년 창설된 이후 7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흑백분리정책인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s)이 여전히 시행 중이었으며 백인들이 흑인을 공개 처형하는 린칭(Lynching)이 북미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때문에 20세기 중후반에 NBA에서 뛰었던 비백인 선수들은 인종차별을 지금보다 더 일상적으로 경험해야 했으며, 그 잔재는 지금까지도 미국 곳곳에 숨어 있다.
끝없는 인종차별 경험으로 인해 마이클 조던은 한 때 자신을 또 다른 의미의 인종차별주의자로 여기기도 했다. 러셀 웨스트브룩은 캐스터, 관중으로부터 인종차별을 경험했다. 지금부터 NBA 역사에서 있었던 인종차별의 역사와 사건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오만한 니그로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재키 로빈슨은 무척 상징적인 인물로 꼽힌다. 그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첫 흑인선수였으며 그가 달았던 등번호 42번은 현재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에서 전부 영구결번돼 있다. 사상 첫 흑인 메이저리거가 되어 인종의 벽을 허물기 시작한 로빈슨의 공을 기린 것이다.
그렇다면 NBA의 재키 로빈슨은 누구일까? 누군가는 NBA 역사상 처음으로 드래프트에서 지명된 흑인 선수인 척 쿠퍼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사람을 NBA의 재키 로빈슨으로 꼽지 않을까 싶다. 바로 빌 러셀이다.
농구인 빌 러셀이 쌓은 업적은 위대함 그 자체다. 1956년부터 1969년까지 13년 동안 그는 보스턴에서 11개의 파이널 우승 반지를 획득했으며 정규시즌 MVP만 5번 수상했다. 리바운드왕도 4차례 등극했다. 러셀은 지금도 NBA 역대 최고 빅맨 논쟁에 빠짐없이 이름을 올리곤 한다.
1966년부터 1969년까지는 보스턴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했다. 러셀은 NBA 역사상 최초의 흑인 감독이었다. 은퇴 후에는 시애틀, 새크라멘토에서 감독 생활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는 명백한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전설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이 더 있다. 러셀이 흑인으로서 겪은 수많은 인종차별의 경험이다.
선수 시절 러셀은 말 그대로 끔찍한 세상에 살았다. 자신의 귀로 직접 들었던 인종차별적인 별명만 셀 수 없을 정도다. 개코원숭이(baboon), 깜둥이(coon), 니거(Nigger), 초콜릿 보이(Chocolate Boy: 과거 북미에서는 boy라는 단어도 흑인들에게 그 자체로 인종차별적인 뉘앙스를 가졌다. 노예제도가 존재하던 시절 백인은 흑인 노예를 boy라고 부르고 흑인 노예는 백인을 sir라고 부르던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예 제도가 폐지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관습은 러셀이 한창 선수 생활을 했던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검은 고릴라(black gorilla) 등이 있었다.
당시 흑인들은 백인들과 같은 공간에 머무는 것이 금지됐는데 러셀 역시 이런 제한된 환경 속에서 선수 생활을 해야 했다. 1961년에는 켄터키 주의 한 식당에서 러셀을 비롯한 보스턴 흑인 선수들이 식사 서빙을 거부당하는 일도 있었다.
보스턴에서 한창 우승 반지를 모으던 시절에는 더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러셀의 집에 무단 침입해 침대에 대변을 버리고 러셀의 우승 트로피와 벽 등을 때려 부수는 사건이 벌어진 것. 심지어 국가기관의 불합리한 감시도 감당해야 했다. 당시 인종차별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공개적으로 냈던 러셀을 FBI는 '오만한 니그로(arrogant Negro)'라고 불렀으며, 수시로 러셀을 미행하곤 했다.
하지만 러셀은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 러셀은 오히려 평온하고 당당하게 맞섰다. 러셀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어떤 사람도, 심지어 백인일지라도 너보다 훌륭하지 않다"는 말을 들려주며 자신감을 심어주곤 했다. 이것이 러셀의 사회적 투쟁심에도 불을 지폈다. 러셀은 1979년에 발간한 자서전을 통해 이런 말을 전했다.
"나는 단지 키가 커서 사람들의 눈에 띄고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게 아니었다. 나는 흑인인 동시에 악명 높은 실력을 가진 운동선수였다." 러셀이 얼마나 자신감 넘치고 꿋꿋한 사람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코멘트다.
러셀뿐만 아니라 당시 NBA에서 뛰었던 모든 흑인 선수들이 차별을 경험하며 커리어를 이어갔다. 리그 시스템부터 문제가 있었다. 1950년부터 NBA에 흑인 선수가 하나 둘 등장하는 상황 속에서 당시 NBA 구단들은 팀당 2명의 흑인 선수만 보유하자는 모종의 합의를 했다. 흑인 선수가 너무 많으면 관중이 경기장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구단주들이 우려했던 탓이다. 훗날 이 숫자는 3명으로 늘어나기도 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과거 NBA에서는 '당연히 그래도 되는 것처럼' 벌어졌다. 1964년 MVP이자 NBA 역사에 손꼽히는 가드인 오스카 로버트슨은 "데뷔 당시 우리 팀엔 나를 포함해 총 3명의 선수가 있었다. 선수 명단이 리포트로 나갈 때면 3명의 흑인 선수 이름 옆에는 별표가 그려져 있곤 했다"라고 경험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뿌리 깊은 코트 안팎의 인종차별은 이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패트릭 유잉과 마이클 조던도 끔찍한 인종차별을 경험했다.
"내가 처음으로 인종차별을 경험한 것은 보스턴에 갔을 때였다. 엄청난 인종차별적 행위들이 우리 팀에 가해졌다. 팀 버스는 박살이 났고 타이어엔 아예 구멍이 났다. 말도 안 되는 호칭으로 우리를 불러대기도 했다. 나는 그걸 더 나은 선수가 되려는 원동력으로 삼으려고 했다." 유잉의 회상이다.
조던은 2014년에 한 인터뷰에서 "한 때는 나 스스로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했다"라고 고백했다. 조던이 이런 말을 한 이유는 그가 백인을 무척 싫어했기 때문이다.
조던이 태어나고 자란 노스캐롤라이나는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지역이었고(노스캐롤라이나는 미국 남부에 위치해 있다. 19세기 노예제도의 영향으로 남부 지역은 지금도 흑인 문제에 대해 보수적이며 적대적이다.), 이는 백인에 대한 조던의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7년 조던은 자신을 '니거'라고 부른 여학생에게 탄산음료를 던져 학교로부터 징계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 여학생에게 음료수를 던져버렸었다.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 것에 대해 강하게 저항했었다. 한 때는 나 스스로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나는 백인들을 싫어했었다." 조던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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