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와 술은 양날의 칼?
[골프 오딧세이-42] 골프를 하며 재미난 일이 세 가지 있다.
골프를 끝내자마자 비가 오고, 사우나 욕조에 몸을 담근 후,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켜는 것을 말한다. 잘 알려진 골프 삼락(三樂)이다.
스포츠 가운데 골프만큼 술과 궁합이 맞는 종목도 드물다. 야구, 축구, 테니스를 하며 술을 마시지 않는다. 경기 도중 혹은 휴식시간에 술을 즐기는 스포츠로는 단연 골프다.
골프와 위스키의 본산이 같은 스코틀랜드라는 점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골프 해방구'로 불리는 미국의 피닉스오픈 때는 갤러리들이 아예 홀 근처에서 술 파티를 벌인다.
이는 아마추어에게만 통하는 말이지 프로골프 선수들은 술에 관한 한 무척 신중하다. 대회 며칠 전부터 술을 자제한다. 신체리듬과 멘털에 문제가 생길까 봐서다.
술로 일세를 풍미하는 사람은 존 댈리(54)다. 알코올 중독 치료까지 받은 댈리는 말 그대로 필드의 풍운아.
그는 PGA투어 5승에 처음 300야드 장타 시대를 열었지만 과음으로 골프 수명을 단축시켰다. 마스터스가 열리는 오거스타에서 판을 깔고 자기 이름의 용품을 판다는 소식도 들린다. 장타무상(長打無常)이다.
우즈(45)도 전처와 이혼 후 슬럼프에 빠져 음주운전으로 체포되기도 했지만 일시적 시련에 그쳤다. 이후론 술로 구설에 오르진 않는다.
국내에서도 유명 선수들은 대부분 술을 멀리한다. 간판급 스타인 최상호, 최경주, 양용은은 가벼운 와인 정도는 하지만 술을 즐기진 않는다.
"술은 긴장과 불안을 해소하지만 골프 전이나 도중에 마시면 소뇌의 조절·균형기능을 저하시켜 집중력과 판단력을 흐리게 합니다. 특히 드라이브 샷의 방향성과 퍼트 집중력에 지장을 초래하죠."
오재근 한국체대 교수의 말이다. 대회 전날 PGA 선수 절반 정도가 술을 마신다는 통계를 접하고 오 교수가 날리는 일침이다.
프로골프대회에서 음주를 금한다는 별도의 규정은 없다. PGA투어는 2017년부터 혈액검사를 의무화하면서 엄격한 도핑방지 프로그램을 적용하지만 알코올을 금지약물에 올려놓지 않았다.
더스틴 존슨과 비제이 싱이 각각 코카인과 성장호르몬 복용으로 출전정지를 받은 적은 있다. 로버트 개리거스도 마리화나를 피워 지난해 3개월 출전정지를 당했다.
아마추어는 다르다. 술을 잘 못하는 골퍼에게도 18홀을 돌고 샤워 후 시원한 맥주 한잔은 감로수나 다름없다. 오죽하면 골프 후 동반자끼리 술과 음식을 즐기며 복기하는 것을 19홀로 명명했겠는가.
핸디캡(Handicap)이란 단어도 골프를 끝낸 후 술자리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술자리가 파할 무렵 모자를 벗어 든 사람이 멤버들로 하여금 돈을 쥔 주먹을 모자에 넣게하면서 비롯됐다는 것.
"핸드 인 드 캡(Hand in the cap)!" 하고 외치면 주머니 사정에 따라 모자에 넣는 돈이 얼마인지 모르게 하려는 배려다.
"5시간 동안 긴장을 풀지 않고 몸과 마음을 집중해 경쟁하려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무장해제하면서 서로 해방감을 만끽하는 데는 술이 최고의 촉매제죠.
현정신과의원 김기현 원장은 체질적으로 술을 못 하는 사람을 빼곤 골프와 술은 좋은 짝궁이라고 말한다. 유달리 한국에선 골프 도중 술이 빠지지 않는다.
겨울철 그늘집에서 따끈한 정종, 여름철 시원한 생맥주나 막걸리는 긴장과 스트레스를 푸는 해독제다. 아예 막걸리를 싸들고 오기도 한다.
주류업체들은 술과 골프의 이런 환상 궁합을 이용해 골프대회 타이틀 스폰서나 선수 후원에 나선다. 단일 업종으로 주류업체가 골프대회에 가장 많은 이름을 걸어놓고 있다.
발렌타인 챔피언십, 조니 워커 클래식, 미켈롭 챔피언십, 기린오픈, 하이트 진로배 등 많은 골프대회가 열렸다. 고진영(하이트 진로)과 안시현(골든블루) 같은 스타 골퍼도 주류회사가 후원한다.
역대급 선수들은 아예 주류사업에 뛰어들었다. 작고한 아널드 파머는 자기 농장 포도로 만든 와인에 '아널드 파머'란 브랜드를 새겼다.
호주 출신 그레그 노먼(65)도 와이너리 사업에 투자했다. 캘리포니아 포도 농장 사이에 골프 코스를 설계할 정도로 와인 애정이 깊다.
어니 엘스(51)는 남아공 와인을 전 세계에 알린 주역이다. 프랑스와 칠레산만 알던 우리에게 남아공 와인을 소개했다. 골프를 매개로 호주와 남아공 와인이 우리와 인연을 맺은 셈이다.
'알고자 하는 호기심과 노력, 타인을 배려하는 매너'에서 골프와 술이 오버랩된다는 점에 착안해 스타들이 명성을 걸고 사업에 나선 것.
와인 가운데 1865라는 브랜드가 있는데 18홀에 65타라는 의미라며 골퍼들 사이에 인기가 좋다. 골프 후에 마시거나 상품으로 사용된다. 이 숫자는 칠레의 와인 생산업체인 산 페드로의 설립연도를 말한다.
골프와 술은 일란성 쌍둥이라는 생각도 든다. 우선 최적의 멤버가 4명이란 점이다. 술자리에서 3명은 허전하고 5명 이상이 모이면 지방방송 관계로 대화 초점이 흐려진다.
골프 멤버도 4명이 베스트다. 적당하게 보험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리스크가 분산되고 승부가 흥미진진하다.
처음 배울 때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에서도 일맥상통한다. 어른 앞에서 술을 배워야 한다는 말도 있듯이 잘못 배우면 주사로 평생 고생한다.
"골퍼 스타일은 좋건 나쁘건 골프를 시작한 일주일 안에 굳어진다"는 해리 바든의 말처럼 스윙자세, 진행속도, 매너도 평생 그대로 간다.
끝나봐야 실력(핸디)과 인격이 드러나는 점도 유사하다. 골프 18홀을 돌고 나면 대부분 감춰진 성향과 실력이 나온다.
술자리도 5시간 함께하면 상대방 내공과 인격을 알게 된다. "얼굴은 거울에 비치고 인격은 술에 비친다"는 명언이 있다.
접대 수단으로도 이만한 게 없다. 요즘 덜하지만 골프와 술은 김영란법 이전까지만 해도 최고의 접대 수단이었다. 골프와 술이 어우러질 때의 상승 효과는 가공할 만하다.
단기간에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도 둘은 효과 만점이다. 축구 테니스 등으로도 인맥을 만들 수 있지만 시간이 소요된다. 술안주로 골프만 한 게 없다.
한두 번 약속을 어기면 잘 부르지 않는다는 점도 흥미롭다. 사람들이 골프와 술 약속을 웬만하면 어기지 않으려는 이유다.
하지만 술은 골프에서 양날의 칼이다. 전날 과음하면 다음날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술냄새 풍기면서 예정시간에 늦으면 그 자체로 민폐다. 골프가 맘대로 안 되면 본인은 물론이고 지켜보는 동반자도 괴롭다.
골프는 하루 전날 침대에서 시작된다는 말도 여기서 연유한다. 고수는 가능하면 전날 저녁 약속을 피해 안정을 취한다.
그늘집에서 가볍게 한잔 하면 무방하지만 원하는 샷이 안 나온다고 필드를 술판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도 자기중심적이다.
사실 골프장 술값도 만만치 않다. 무심코 막걸리 한 통을 마셨다간 2만원 안팎의 비용을 감내해야 한다. 3통이면 평일 수도권 골프장 그린피에 해당하는 액수다.
무엇보다 술 마시고 카트 운전이나 스윙에 따른 안전사고에 유의해야 한다. 요즘 노캐디 골프장이 늘어 동반자들이 자제하도록 유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남자가 첫잔을 들 때와 여자가 마지막 잔을 들 때는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O 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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