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렁쇠 소녀’가 이렇게 컸어요
울긋불긋 화려한 경기복을 입은 5명이 동시에 똑같은 높이로 공을 올려 던지더니 서로 교차해 받아냈다. 공을 다시 올려 던진 후, 다리를 쭉 뻗어 돌고는 다른 공을 받아냈다. 한 편의 서커스 같은 이 경기는 리듬체조 단체 종목이다. 5명의 선수가 각각 수구를 들고 2분 15초~2분 30초 동안 10여개의 난도를 수행하는 경기다.
완벽한 호흡이 중요하다. 5명 모두 틀리지 않고 정확한 동작을 수행해야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아이돌의 ‘칼군무’에 수구를 더했다고 보면 된다. 개인 종목보다 화려하고 연기가 꽉 차서 볼거리가 많지만, 리듬체조 불모지인 한국에선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아시아 최고 성적(4위)을 기록한 ‘리듬체조 요정’ 손연재(은퇴)는 개인 종목 선수였다. 단체 종목은 올림픽에 출전한 적이 아직 없다.
그런데 최근 단체 선수가 되겠다는 선수들이 늘어났다. 지난 6월까지 리듬체조 단체 국가대표로 활동한 김민(19·세종대)은 “손연재 언 니처럼 유망한 선수들은 대부분 러시아에 전지훈련을 다녀오고 외국인 코치에게 안무를 받는다. 그러다 보니 개인 국가대표 경쟁이 치열해졌고, 눈을 돌려 단체 국가대표 지원자가 늘었다”고 전했다. 전국대회 1·2등을 다투던 김민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단체 선수로 활동하면서 지난 2019년 단체 국가대표가 됐다.
보통 리듬체조 선수라고 하면 여리여리한 모습을 기대한다. 그런데 단체 선수들은 음식을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훈련량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김민은 “새벽 6시에 5㎞를 뛰었다. 15㎏ 모래주머니를 들고 계단을 오르고, 사이클도 탔다. 웨이트 트레이닝도 하루는 상체, 하루는 하체 훈련을 나눠서 했다. 어깨가 넓어지고 허벅지도 탄탄해졌다”며 웃었다. 연기 시간이 개인전(1분 30초)보다 1분 정도 길고, 수구를 동일한 높이와 속도로 교환하는 데 힘을 많이 쓰기 때문이다.
지난 6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대표팀 주장 김민주(20·한국체대)가 발 골절상을 입었다. 김민은 “출국 사흘 전에 민주 언 니가 다쳐서 기권할 상황이었다. 후보 선수와 손발을 맞추는 게 쉽지 않아서 모두 걱정이 컸다. 그런데 민주 언 니가 통증을 참고 테이핑을 하고 뛰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한국 리듬체조 단체 대표팀은 은메달을 땄다. 아시아선수권대회 역대 최고 성적을 거뒀지만, 도쿄올림픽 출전 티켓은 한 장(우즈베키스탄)뿐이었다.
한국 리듬체조 단체 대표팀의 올림픽 첫 출전은 무산됐다. 그러나 김민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공개된 프로필 사진이 유명해진 것이다. 갑작스러운 관심에 그는 “유난히 사진이 잘 나온 것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김민은 7년 전 이미 유명세를 탔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개막식에 등장한 굴렁쇠 소녀가 바로 그다.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한 굴렁쇠 소년 영상에 이어 하얀 굴렁쇠를 굴리며 나왔다. 이후 배우 장동건, 김수현과도 함께 등장, ‘굴렁쇠 소녀’로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김민의 고모는 서울 올림픽에서 한국 최초로 리듬체조 선수로 출전한 김인화씨다. 김민은 고모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유연성과 담대함을 자랑했다. 그는 “돌이 지났을 때, 발가락을 머리 위로 올려 통통 튀기면서 놀았다더라. 세 살 때는 놀이터 정글짐, 미끄럼틀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등 무서움이 없었다고 한다”고 전했다. 여섯 살에 리듬체조를 취미로 시작한 김민은 1년 만에 전국대회에 나가 은메달을 따면서 리듬체조 유망주로 떠올랐다.
김민은 인천 아시안게임 당시 “언젠가 올림픽에 꼭 출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김민은 올해 태극마크를 내려놨다. 그는 “리듬체조 선수들의 최전성기는 10대 후반이다. 걸출한 후배들이 많아서 걱정이 안 된다. 후배들이 2024년 파리 올림픽 리듬체조 단체 종목에 출전하는 멋진 역사를 만들어주면 좋겠다”면서 “나는 이제 대학 동료들과 내년 6월 열리는 하계유니버시아드(중국 청두)에 출전해 입상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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