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오픈 보다 롤랑가로스로 불리는 이유
[김성준 객원기자] 5월 22일 개막하는 시즌 두번째 그랜드슬램 프랑스오픈(French Open)은 오히려 롤랑가로스(Roland Garros)로 더많이 불린다. 왜 그럴까?
프랑스오픈에는 왜 비행사의 이름이 붙여졌나
4대 그랜드슬램의 경기장이나 대회 이름은 대체로 자국의 유명 테니스 선수나 테니스 발전에 공로가 큰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짓는다. 가령 US오픈에는 흑인 남자선수 최초로 윔블던, US오픈, 호주오픈에서 우승을 한 아서 애시의 이름을 딴 아서 애시 스타디움이 있다.
호주오픈에는 자기 나라의 유명 테니스 선수의 이름을 딴 로드 레이버 아레나와 마가렛 코트 아레나가 있으며, 프랑스오픈에도 필립 샤트리에 코트와 수잔 랑랑 코트가 있다. 필립 샤트리에는 테니스 선수 출신으로 나중에 저널리스트가 되었고 스포츠 행정가로도 활약하였다. 그는 1973년부터 20년간 프랑스테니스협회장을 역임했으며, 동시에 1977년부터 1991년까지 국제테니스연맹회장을 역임했다. 수잔 랑랑은 1914년부터 1926년까지 총 31번의 우승을 하며 세계 여자테니스를 평정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프랑스오픈은 롤랑가로스로 더 많이 불린다. 프랑스오픈의 공식 트위터 계정이나 홈페이지도 롤랑가로스로 표기되어 있다. 구글에서 프랑스오픈을 검색하면 롤랑가로스(www.rolandgarros.com)가 검색된다. 파라솔, 모자, 가방 등 각종 테니스 용품에도 롤랑가로스가 새겨져 있다. 이쯤 되면 롤랑가로스는 분명 테니스와 관련이 깊은 인물일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롤랑가로스(1888~1918)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비행사였던 프랑스의 전쟁영웅으로 테니스와 전혀 무관한 사람이다. 그는 비행 개척자로서 지중해를 비행기로 횡단한 첫 사람이며, 학창시절 럭비선수였지만 정작 테니스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롤랑가로스는 누구인가?
롤랑가로스는 인도양 마다가스카르섬 옆의 프랑스령(領)인 리유니온이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의 엘리트학교 그랑제꼴 중의 하나인 경영전문대학원 HEC 파리에서 공부했다.
젠슨 드 세일리 고등학교는 파리의 부유한 법률가인 젠슨 드 세일리(Janson de Sailly)가 1884년에 설립한 학교이다. 이 학교는 과학, 군사, 산업, 외교, 정치 등 여러 방면에서 프랑스 엘리트를 배출하는 학교로 발전했다. 대통령, 총리, 노벨상 수상자, 배우 등 이 학교가 배출한 유명 동문들을 학교의 건물 벽에 조각으로 새겨놓고 있다.
그 중의 한명이 롤랑가로스이다. 1차 세계대전 때는 이 학교의 많은 선생들이 전선에 나가 전쟁에 참여하였고, 1915년에는 학교 건물이 군대병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학교 출신들은 ‘조국을 위해, 책과 칼로(For the homeland, by the book and by the sword)’라는 모토로 육군, 해군에 입대해 아프리카 지역에 많은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HEC 파리는 1881년 파리 상공회의소에 의해 세워진 경영전문학교이다. 당시만 해도 장사꾼은 파리에서 도둑놈으로 인식될 때 지어진 학교지만, 지금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경영대학원 중의 하나이다. 2006~2013년까지 8년 동안 7번이나 파이낸셜 타임즈가 선정한 유럽의 가장 좋은 경영대학원에 뽑히기도 했다.
롤랑가로스는 그곳에서 미래에 그를 영원히 기억해줄 친구를 만난다. 바로 에밀 레저인데 롤랑가로스와 그는 1906년 동시에 HEC 파리에 입학하여 같은 반 친구가 된다. 그는 유명한 럭비선수였으며 롤랑가로스도 그를 따라 럭비클럽에 들어가 럭비선수가 됐다. 그는 HEC 파리를 졸업하고 롤랑가로스와 같이 전투비행사로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에밀 레저는 나중에 파리 럭비클럽 회장이 되었고 프랑스오픈 스타디움을 짓는 책임자가 되었으며, 그의 친구이자 프랑스 전쟁영웅인 롤랑가로스의 이름을 따서 경기장의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비행사로서의 롤랑가로스
롤랑가로스는 1909년 19살에 처음 비행을 시작했다. 당시 몸무게가 가벼운 사람만 탈 수 있었던 비행기인 잠자리 모양의 경비행기(Demoiselle)를 타기 시작했고 1910년에는 비행사 자격증을 얻었다.
롤랑가로스는 1913년 지중해를 건넌 최초의 프랑스 비행사이며 파리-마드리드, 파리-로마 비행 경주에서 두 차례 우승하기도 했다. 1914년 그는 비행기 제조사(Morane-Saulnier)에서 시험 비행사로 일했으며, 당시 가장 높은 고도인 4천250미터 상공을 날아 세계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같은 해 전쟁이 나면서 그는 프랑스 공군에 입대하여 서부전선에서 복무했다.
1914년 8월 3일 롤랑가로스는 독일 전선을 날며 독일 비행기를 파괴시키고 두 명의 파일럿을 쓰러뜨리며 세계 역사에서 최초의 비행전투를 한 사람이 됐다. 1914년 말 그는 새로 개발된 비행기를 시험하기 위해 군대에서 나와 원래 회사로 돌아왔다. 이 새로운 비행기는 프로펠러에 총을 실어 전투가 가능한 비행기였다. 1915년 봄 롤랑가로스는 이 새로운 비행기를 타고 처음으로 독일군 비행기를 쏘아 격추 시켰다.
그런데 4월 18일 제조사의 Type L 비행기를 타고 플란더스 지방의 독일군 상공을 날고 있을 때 그의 비행은 멈춰야 했다. 독일군이 쏜 총에 맞아 비행기가 비틀거렸는데 그 와중에도 그는 총을 계속해서 쏘려고 했고 폭탄을 던졌다(당시에는 비행사가 직접 폭탄을 던졌다고 한다). 결국 그는 총에 맞고 추락하면서 도망치려 했으나 붙잡혔다. 비행기는 독일군 수중에 들어갔고, 그는 포로가 되었다. 그는 여러번의 시도 끝에 1918년 2월 14일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
탈출한 후 그는 스스로 다시 공군에 들어갔다. 그리고 1918년 10월 5일 다시 부지에르 전투에 참여하여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한 달 전이었고, 그의 30세 생일 하루 전이었다.
테니스와 무관했던 롤랑가로스는 인도양의 작은 섬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명문학교에서 공부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평탄한 미래의 삶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당시엔 생소한 비행사가 되려는 도전정신이 있었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여해 포로로 잡히기도 하고 또 탈출하자마자 다시 비행사가 되어 전투에 참여하는 투지와 용기를 지녔다. 그랬던 그이기에, 그를 영원히 기억하고자 한 친구에 의해 프랑스오픈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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