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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희 전 감독, 저같은 바보가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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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조원규 칼럼니스트]  슈팅과 드리블 모두 완벽한 선수다.” NBA 스타 클레이 톰슨(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을 가르쳤던 세계적인 스킬트레이너가 한국의 15세 소년에게 극찬을 했다고 하네요.

지난 2월 강원도 양구에서 열린 KBL(프로농구연맹) 유스 엘리트 캠프에서 중등부 최우수선수상을 받은 강성욱(호계중, G)입니다. 강성욱은 강동희 전 동부 감독(이하 강동희 감독)의 아들입니다. 강동희 감독에게는 두 아들이 있고, 두 아들 모두 농구선수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공교로운 인연입니다. 한국농구에 지각변동을 불러온 허동택 트리오의 아들들이 모두 농구를 하고 있습니다. 허재 전 남자 국가대표팀 감독의 두 아들은 DB와 KT의 주축 선수로 자리 잡았습니다. 김유택 전 중앙대 감독의 아들 김진영은 올해 KBL 신인선수 드래프트 로터리 픽 후보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허동택 트리오가 이룬 업적은 너무나 큽니다. 그 명성은 넘기 힘든 산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높은 산을 보면서 자랐기에 보다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강성욱 선수의 기사를 보며 자연스럽게 강동희 감독이 떠올랐습니다. 강동희 감독은 2013년 승부조작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재판 결과는 유죄였고, 대한민국농구협회로부터 제명을 당했습니다. 사실상 영구제명이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그런데 농구계를 완전히 떠나지는 못했습니다. 아들이 농구를 하고 있고, 본인은 농구교실을 통해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그의 근황이 궁금했고, 인터뷰 요청을 했습니다. 그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었나 봅니다. 며칠의 시간이 지나고 인터뷰 약속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 농구를 대표했던 당대 최고의 포인트가드. KBL 첫 해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의 최우수선수상을 동시 수상했고, 감독 데뷔 두 번째 해에 KBL 감독상을 수상한 레전드. 그런데 그 모든 명예를 한 번에 날려버린 프로 감독 사상 초유의 승부조작 사건. 찬바람이 5월의 따뜻한 햇살을 밀어내는 오후에 인천의 농구교실에서 강동희 감독을 만났습니다.

Q.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3년 사건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는 처음으로 아는데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벌써 7년이네요. 전에는 가족과 보낸 시간이 적었습니다. 지금은 가족들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내가 전에는 많이 외로웠는데 지금이 어떤 면에서는 더 편하다고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애들이 어릴 때 같이 있어주는 행복을 얻었습니다. 힘들 때 가족이 큰 힘이 되기도 했고…. 평범한 생활의 소중함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Q. 강성욱 선수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대견하지만 한편으로 부담도 있을 것 같습니다. KBL 엘리트 캠프에서 중등부 최우수선수상을 받았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농구를 하겠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말렸습니다. 제가 그런 일이 없었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운동보다 운동 외적인 부분에서 힘들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매주 주말을 반납하고 운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허락을 했습니다. MVP는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만하지 않고, 지금처럼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Q. 둘째 아들도 농구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둘째는 중학교 1학년입니다. 형 따라 다니다 자연스럽게 농구를 시작했어요. 키는 형보다 더 클 것 같은데, 역시 강동희 아들이라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니까…. 특혜를 받아서 애들이 뛰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는 점도 힘드네요.

Q. 농구 선배로서 두 아들의 장단점을 평가한다면?
첫째는 기본기가 탄탄합니다. 장점은 일대일 농구를 잘한다는 것이고, 단점은 다섯 명이 하는 농구를 잘 못해요. 자기 득점 위주의 농구를 하는데  패스에 눈을 떠야 보다 좋은 선수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패스를 하면서 득점은 필요한 순간에 하면 됩니다. 몸싸움을 싫어하는데 그 점도 개선이 필요해요. 둘째는 형과 반대 성향입니다. 패스를 할 줄 알고 돌파도 잘해요. BQ도 좋은 것 같고. 슛과 드리블은 형보다 부족합니다. 감독이 좋아할 스타일이에요. 리바운드와 수비를 할 때 투쟁심이 보여요.

Q. 기대치를 어느 정도로 보세요? 아버지를 넘을 수 있을까요?
중학교 시절만 보면 저보다 다섯 배는 잘 합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대학교로 갈수록 본인의 경쟁력을 개발해야죠. 멈춰 있으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신장과 힘, 경기를 풀어가는 능력을 지금보다 발전시켜야 합니다. 기술은 첫째가 좋고 센스는 둘째가 좋습니다. 첫째는 패스에 눈을 뜨면 무서운 선수가 될 수 있어요.

Q. 아들들에게 직접 농구를 가르치기도 하나요?
자연스럽게 얘기하는 부분이 있죠. 제가 주말에 체육관에 있고, 애들도 주말이면 체육관에 나오니까. 다만,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이 우선입니다. 저는 보조하는 역할이에요.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들과 같이 즐겁게 운동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할아버지’에게 농구를 배워서 기본기가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그 때 배웠던 것들을 아이들에게 전해주기도 합니다.

■ 살면서 그렇게 무서웠던 적이 없었어요
강동희 감독이 얘기한 ‘할아버지’는 故 전규삼 선생입니다. 1961년부터 송도중학교와 송도고등학교를 지도하며 김동광, 이충희, 강동희, 신기성, 김승현 등 많은 레전드들을 길러냈죠. 당장의 팀 성적보다 기본기와 창의성을 중시했다고 전해집니다. 신기성 전 신한은행 감독은 “이기는 농구가 아닌 즐기는 농구를 가르쳐 주셨다”고 과거 인터뷰에서 이야기 했습니다. 송도고등학교가 ‘가드의 산실’이 된 이유입니다.

강동희 감독은 지금 인천에서 농구교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은 이후에 본격적으로 운영에 뛰어들었다고 하네요. 할아버지에게 배운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농구를 가르치고 싶었고, 선수 생활을 마친 후배들에게 일자리도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농구교실과 가르치는 아이들에 대해 얘기할 때 강동희 감독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습니다.

Q. 농구교실에서 다른 선수들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들들을 가르칠 때와 다른 점이 있나요?
제 자식은 제가 못 가르치겠어요(웃음). 놀이를 하는 거죠. 못한다고 혼내면 받아들이는 눈빛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제 말을 받아들이는 자세부터 달라요. 아주 진지합니다.

Q. 농구교실을 오래 했습니다.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셨나요?
1999년에 시작했으니 벌써 20년이네요. 친구들이 이름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제 이름으로 피해를 안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초상권 문제로 구단에서 징계를 받을 수도 있는 사안이었는데, 구단에서도 이해를 해주셨습니다. 제 인생이 그런 것 같아요. 조건 없이 이름을 주고 운영권을 줬습니다. 일 년에 몇 번 사인회나 송년회에만 참석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2015년에 세무조사가 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사업자도 없었어요. 이후 정식으로 법인을 설립하고 운영에 관여했습니다.

 

Q. 직접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느끼는 점도 많을 것 같습니다. 
사실 농구교실은 생소했어요. 그런데 농구교실이 저변을 확대하면서 유망주를 발굴하고, 은퇴선수들에게는 직업을 제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이들에게도 좋습니다. 요즘은 함께 뛰어 놀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잖아요. 농구 팀을 하나 운영하면 12명이 오랜 시간 땀을 흘리면서 친해집니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좋아요. 소심했던 아이들이 밝고 활달하게 변하는 모습도 좋고, 그 모습을 보면서 강사들도 보람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Q. 최근 인터뷰에서 자주하는 질문인데요, 감독님 농구하던 시절과 요즘 아이들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우리 때는 지금처럼 세련되지는 않았습니다. 기본적인 것을 중요시했죠.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들도 그랬습니다. 슈팅이나 드리블 같은 기본적인 것들을 반복 훈련을 통해 몸에 익혔어요. 요즘 아이들이 신체적인 조건은 좋습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것들은 덜 갖춰졌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기본적인 것을 시작으로 2대2부터 3대3, 4대4, 5대5를 차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Q. 유죄 판결이 나왔을 때 농구교실도 위기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다들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론이 너무 안 좋아서 이름도 바꿨어요. 그런데 선생들과 아이들의 유대관계가 좋았습니다. 제 사건으로 회원 수가 확 줄지는 않았다고 하네요.

Q. 재판에서 끝까지 혐의를 부인했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승부조작 제안인지 몰랐나요?
승부조작이라는 단어 자체를 몰랐습니다. 축구가 터지면서 알았어요. 축구가 2011년 5월에 터졌습니다. 제 일은 2011년 1월에 있었죠. (돈을) 안 받았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돈이 연관되면서 승부조작이 됐습니다. 10년 된 후배가 있었습니다. 우리 집안을 잘 알고 농구하는 선수들도 많이 아는 후배에요. 알고 보니 그 후배가 브로커였습니다. 서울에 오면 늘 자는 호텔이 있었고, 그 후배가 방에도 자주 놀러왔어요. 그 날도 “잠깐 들를게” 하고 와서는 돈을 던져놓고 갔습니다. 당황스러웠죠. 공돈이라는 생각에 욕심도 생기고…. 뒤에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Q. 대가 없이 받기에는 너무 큰 금액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제가 알려준 것이 없었습니다. 순위가 확정되어 주전을 뺀다는 것만 확인시켜줬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이미 얘기한 내용이에요. 이후에 이런저런 요구가 계속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발 나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돈은 다 줄 테니까 가져가라고 사정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형님. 그냥 드린 거니까 쓰세요”라고 얘기해요.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큰 쓰나미가 될지는 몰랐습니다. 인터넷으로 도박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Q. 수사를 받기 전부터 이미 불면의 시간들을 보냈을 것 같습니다.
5월에 축구가 터지면서 숨이 턱 막히고 다리가 후들거렸습니다. 살면서 그렇게 무서웠던 적이 없었어요. 아내와 가족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변호사와 믿을 수 있는 선배들을 만나 상담했습니다. 한결 같이 빨리 돈을 돌려주고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라야 하지 않겠냐고 얘기했어요. 2013년 5월까지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Q.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항소를 포기했습니다.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어쨌든 돈이 결부가 됐으니까…. 정상적인 선수기용이었지만 돈을 받았잖아요. 법정에서의 다툼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수의 입고 움직이는 것도 그랬고요. 항소를 하면 또 언론에 나올 것이고….

Q. 일반인 친구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점도 영향이 있었을까요?
어렸을 때부터 착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남에게 피해 안주고 의리를 지키는 것이 착한 것이라고 생각했죠. 친구들도 가려서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잘났다고 잘해주고 못났다고 못해주지도 않았습니다. 허재 형이 지적도 했어요. 너는 왜 그렇게 쓸데없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냐고…. 사람 위치가 바뀌면서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많이 겪었습니다. 상처도 많이 받았죠. 우리 애들은 나처럼 안 살았으면 좋겠어요.

■ 농구는 평생 마음의 빚입니다
정봉섭 전 중앙대 감독은 강동희를 ‘순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트러블이 적었다고 합니다. 기아자동차 입단에 관한 일화도 애기했습니다. 당시 현대와 삼성은 강동희 스카우트를 위해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정봉섭 감독의 권유로 기아자동차에 입단했고, 다른 팀의 조건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중앙대 진학도 할아버지(故 전규삼 선생)의 뜻이었다고 하죠.

강동희 전 감독은 “착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얘기했습니다. 네이버에서 착하다를 검색하면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로 나옵니다. 곱고 상냥하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태도입니다. 바르다는 것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판단입니다. 어쩌면 그가 말한 ‘착하다’의 의미는 ‘불화(不和)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판단이 배제된 것이죠. 그는 언론에 나온 정보만 확인을 해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될지 몰랐다고 했습니다. 본인이 무지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단지 정보 확인의 대가라고 보기에는 금액이 너무 컸습니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 무지(無知)가 더해지면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승부조작 사건 이후, 강동희 감독의 소식을 처음 접한 것은 승부조작 방지 강사를 한다는 한 언론의 보도입니다. 그 뉴스를 보면서 받은 첫 느낌은 ‘불편했을 것 같다’ 입니다. 대한민국 포인트가드 계보를 잇는 레전드 스타고 단 10명에게만 허락된 남자 프로농구팀 감독이었습니다. 후배들 앞에서 어떻게 승부조작의 유혹에 빠졌는지 강의하는 마음이 편할 리가 없겠지요.

Q. 승부조작 방지 강사를 했습니다. 보도를 보면서 불편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었죠. 조용히 묻혀서 살고 싶었고…. 프로스포츠연맹에서 당시 경험을 얘기해 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리베라 호텔에서 처음 했을 때 땀도 나고 창피하기도 했어요. 유명한 선수들도 많은데 안 좋은 얘기를 해야 하니까…. 그런데 막상 끝나고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수들이 진지하게 들었어요. 이후 다른 자리에서 강의할 때에도 이런 감정은 반복됐습니다.

Q. 강사료는 전액 기부했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돈이라고 생각했어요.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 강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돈을 안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돈은 받아야 한데요. 좋은 곳에 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기부를 했습니다.

Q. 마음의 빚은 어떤 의미인가요?
무엇을 해도 평생 갚을 수 없는 마음의 빚이 있습니다. 농구로 많은 명예를 얻고 사랑을 받았어요. 그런데 큰 실망을 줬습니다. 그걸 하나하나 갚아가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뭘 해야 될지 몰랐어요. 그래서 양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삼년간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지금도 농구교실 아이들과 한 달에 한번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계속 찾고 있어요.

Q.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불행하지도 않아요. 운동하면서 가게 준비한 것이 자리를 잡았고…. 당시에는 죽음까지 생각했어요. 지금은 농구교실을 하면서 부딪힐 수 있는 친구들이 있고, 이마저도 저에게는 큰 행복입니다. 힘들었던 시기에 평범함을 채우면서 소소한 행복의 크기도 키웠던 것 같습니다.

Q. 사실상 영구제명을 당했어요. 현장에 복귀하고 싶은 마음은 없나요?
정말 꿈에도 그런 것은 없습니다. 현장 복귀보다는 농구장에서 선후배들과 격의 없이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요. 유소년 육성이나 이런 면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Q. 백세시대라고 합니다. 절반의 인생이 남았어요.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지금의 평범한 생활에 불만은 없어요. 드러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편하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농구선수를 하고 싶은 초등학생들에게 옛날 할아버지가 가르치셨던 것들을 심어주고 싶어요. 그것들은 초등학교 때에 심어줘야 합니다. 남은 시간은 봉사를 하면서 마음의 빚을 갚고 싶어요.

Q. 인터뷰를 하면서 할아버지의 그늘이 크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가 저를 아들처럼, 손자처럼 대해 주셨습니다. 농구선수로 자유스럽게, 틀에 갇히지 않게 잘 이끌어주셨죠. 지금 생각해도 당시에 어떻게 그렇게 가르칠 수 있었는지 놀랍습니다.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강동희는 평범한 키 작은 선수 중의 하나였을지도 몰라요. 그 일이 있었을 때에도, 살아계셨다면 제일 슬퍼하셨을 분입니다. 농구뿐만 아니라 학생으로서, 인간으로서의 기본기도 강조하셨던 분이니까요.

Q. 제가 인터뷰에서 항상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강동희에게 농구란?
제 마음의 빚 같아요. 감독 시절까지는 제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지금 농구는 평생 마음의 빚이죠. 씻어도, 씻어도 씻을 수 없고, 노력한다고 씻어지지도 않아요. 죽을 때까지 짊어져야 할 짐입니다.

■ 낙인 그리고 역사를 위한 변명
강동희 감독. 한국 농구를 대표했던 포인트 가드였고 감독으로도 성공적으로 커리어를 이어갔습니다. 그런데 2013년 9월 3일에 유죄 판결을 받았고, 지금 그에게 남아 있는 건 승부를 조작한 범죄자라는 지워지지 않을 낙인입니다. 인터뷰를 기획한 이유는 그의 낙인을 지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변명을 듣기 위함도 아닙니다. 농구팬들에게 전하는 그의 심경을 듣고 싶었고, 그것을 통해 교훈을 얻기 위함입니다.

“아빠 역사란 도대체 무엇에 쓰는 것인지 저에게 설명 좀 해주세요.” 마르크 블로크는 『역사를 위한 변명』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답을 찾아갑니다. 역사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것에 도움을 주는 실용학문이라는 답입니다. 항적을 모르는 배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이치입니다. 유명한 E.H.카(Carr)의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학교의 교(校)는 나무와 사람이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어울려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것이 교육입니다. 교육의 원칙은 운동선수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운동부는 고립된 섬에 살았습니다. 학교에 있지만, 그들에게 학교는 다른 의미였습니다.

강동희 감독은 농구인으로서 훌륭한 브랜드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치를 몰랐고, 활용하는 방법은 무지했습니다.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늘의 인터뷰는 강동희와 같은 사례가 다시 나오지 않을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일탈은 어느 나라, 어느 사회에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를 교훈으로 삼아 일탈의 가능성을 낮추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를 위한 변명이고,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입니다. 강동희의 과오를 방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면 과거의 부끄러움은 미래의 자산이 됩니다.

필자에게 이번 인터뷰는 부담이었습니다. 그 부담은 강동희 감독도 같았나 봅니다.

“인터뷰를 한다고 했을 때 만류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상처만 받는다는 얘기였어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하기로 했습니다. 저에게 인터뷰는 (승부조작 방지) 강연의 연장입니다. 저 같은 바보가 다시는 없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 본 인터뷰는 점프볼 6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 사진_ 문복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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