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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 준다는 말에 30승…혹사·도박·마약에 망가진 ‘너구리’

보헤미안 0 504 0 0



[스포츠 다큐 - 죽은 철인의 사회] 비운의 전설, 투수 장명부
 
프로야구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활약한 장명부는 1983년 30승의 대기록을 세웠다. [중앙포토]


2005년 4월 13일, 일본 와카야마현의 한 도박하우스에서 50대 중반 남성이 변사체로 발견됐다. 사인은 심장마비로 밝혀졌다. 자신이 운영하던 도박장에서 쓸쓸하게 숨진 이 사람의 이름은 후쿠시 히로아키. 한국 이름은 장명부(張明夫), 한국 프로야구의 유일한 ‘30승 투수’였다.

장명부는 프로야구 초창기 뉴스메이커였다. 그가 1983년에 세운 시즌 최다승(30승), 최다 등판(60경기), 최다 투구이닝(427과1/3)은 앞으로 깨지지 않을, 아니 깨져서는 안 될 기록이다. 이름만 프로였지 실업야구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시기, 일본 프로야구와의 현격한 실력차, 투수 분업이나 투구수 관리 등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만화에나 나올 기록들이 세워졌다. 그가 85년 기록한 시즌 최다 패전(25패) 또한 지워지기 힘든 기록이다.

고교 선수 이상훈·김상엽 ‘비밀 과외’
 

삼미 슈퍼스타즈의 로고. 85년 모기업의 부도로 인해 청보 핀토스로 넘어갔다. [중앙포토]


장명부는 프로야구 원년(82년) 꼴찌 팀인 인천 연고 삼미 슈퍼스타즈에 입단했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4000만원의 계약금과 연봉 4000만원을 받는다고 구단이 발표했다. 그는 입단 기자회견에서 “시즌 30승을 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입단 전에 삼미 야구단 사장이 농반진반으로 “자네 정말 30승 할 수 있겠나. 하게 되면 1억원을 주겠네”라고 했고, 장명부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장명부는 시즌 100경기 중 60경기에 나와 악착같이 30승(16패 6세이브)을 채웠다. 그러나 사장은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했고, 장명부와 삼미 사이는 틀어졌다. 혹사 후유증과 구단과의 마찰로 장명부는 84년 13승20패, 85년 11승25패의 성적을 남겼다. 86년 빙그레로 옮겼으나 1승18패의 처참한 성적을 내고 시즌 중 퇴출당했다.

장명부는 사생활이 깔끔하지 않았다. 술과 담배를 즐겼고, 도박 빚을 많이 졌다. 마약에도 손을 대는 바람에 결국 일본으로 추방당했다. 장명부를 만나러 가는 시간여행에 박영길·홍순일 두 분의 원로를 모셨다. 박 선생은 롯데 자이언츠 초대 감독(1982∼83), 삼성 라이온즈 감독(1987∼88)을 역임했고, 삼성 감독 시절 장명부를 코치로 데려왔다. 야구기자 출신인 홍 선생은 장명부가 한국에 올 때부터 일본으로 돌아가기까지의 과정을 꿰고 있고 그와의 교분도 두터웠다.

장명부의 별명은 ‘너구리’다. 마운드에서 능글능글하게 타자를 요리하는 게 너구리 같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설렁설렁 던지다가도 주자가 많아지면 전력투구해서 타자를 잡아냈다. 박 선생은 “장명부는 타자와의 수싸움이 뛰어났다. 덤비는 선수, 기다리는 선수 등 타자의 패턴을 파악하고 던졌다. 컨트롤도 좋았다. 몸쪽 스트라이크에서 한 개 정도 빠지는 공을 던지고 포수가 손목을 안쪽으로 꺾으면(야구 속어로 ‘컨닝’이라고 한다) 심판들이 스트라이크를 잡아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박 선생은 “일본에서 산전수전 겪은 장명부는 한국 타자를 갖고 놀았다. 바둑으로 치면 1급이 5급하고 두는 것과 같았다”고 부연했다.

장명부는 어릴 적 몸이 매우 약했고 집안도 가난했다. 초등학교 4학년 일기장에 ‘병이 나으면 야구선수가 돼 성공하고 싶다’고 쓴 것을 본 아버지가 야구 글러브를 사 줬다. 돗토리니시고교 에이스였던 장명부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으나 3년간 18경기 출장, 0승3패의 초라한 성적을 남겼다. 난카이 호크스를 거쳐 히로시마 카프에서 전성기를 누렸다. 78년과 80년에 15승을 달성하고 재팬시리즈 우승(79, 80년)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82년 3승11패로 부진했고, 구단과의 연봉 협상 중에 뛰쳐나온 뒤 기자들을 모아 은퇴 선언을 했다.

홍 선생은 “장명부는 일본에서 오랫동안 차별에 시달렸다. 잘 던지고 있는데도 승리투수 요건을 갖추기 직전에 강판당하기 일쑤였다. 당시 장훈 선생이 한국행을 권했고, 일본 야구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장명부는 한국에서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자 한국행을 결심했다”고 소개했다.

장명부는 구단 발표와는 달리 실제로는 계약금 8000만원, 연봉 400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기사가 운전하는 차량, 가족의 일본 왕복 항공권 등도 제공됐다. 당시 강남의 30평 아파트 값이 3000만원 정도였다.
 

재일동포 포수 김무종(왼쪽)과 함께 83년 베스트10에 뽑힌 장명부. [중앙포토]


박 선생은 “장명부가 엄청난 돈을 받게 되자 흥분했던 것 같다. ‘30승=1억 보너스’ 얘기를 들었을 때 문서로 남기거나 녹음을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박 선생은 “허리가 좋지 않았던 장명부가 83년 혹사로 인해 구위가 많이 떨어졌다. 팔이 고무팔이 됐으니 손목으로 아무리 공을 채도 공끝이 살아나가지 못했다. 변화구 각도도 밋밋해지면서 통타를 당했다”고 설명했다.

장명부가 망가진 또 하나의 원인은 도박이었다. 일본에서는 파친코를 누구나 부담없이 출입한다. 74년 일본으로 귀화한 장명부는 한국에서도 카지노에 자유롭게 갈 수 있었다. 그는 도박장에서 큰돈을 날리고 빚도 졌다. 홍 선생은 “86년 신생팀 빙그레에 입단할 때 2년치 연봉 1억5000만원을 한꺼번에 달라고 했다. 아마 그때도 조폭에게 빚을 져 시달리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86년 빙그레에서 퇴출당한 뒤 장명부는 여기저기 다니며 ‘야구 과외’를 했다. 당시 서울고에서 그의 지도를 받은 투수 중 하나가 ‘야생마’ 이상훈이었다. 87년에는 삼성 박영길 감독이 “대구고에 괜찮은 투수가 있으니 와서 좀 봐 달라”고 했다. 당시에는 프로가 아마추어를 지도하는 게 금지돼 있었다. 6개월간 밤에 몰래 불러내 타자 상대하는 요령을 가르쳤다. 그 선수가 삼성의 고졸 에이스가 된 ‘만딩고’ 김상엽이다.

장명부의 능력을 인정한 박 감독은 그를 정식 코치로 쓰려고 했다. 사생활이 문란하다며 극구 반대한 코치가 있었다. 박 감독은 “장명부처럼 야구 많이 아는 사람이 한국에 누가 있나. 우리는 그의 노하우만 빼먹으면 된다”고 밀어붙였다.

“장명부 통제할 국내 지도자가 없었다”

그러나 장명부는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다. 87년 3월 일본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소득세 체납(750만원)이 드러나 공항에서 출국금지 당했다. 91년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돼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6개월 실형을 받았다. 장명부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영구제명된 뒤 일본으로 추방당했다. 아내도 세 아들을 데리고 그의 곁을 떠났다.

일본으로 돌아가서도 장명부는 도박장 주위를 맴돌았고, 결국 도박장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가 숨진 방의 벽에는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일본어 글귀가 써 있었다고 한다.

박영길 선생은 “그를 통제할 만한 지도자가 국내에 없었다. 따끔하게 혼을 내고 이끌어 준 사람이 있었다면 장명부는 선수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도 한국 야구에 큰 기여를 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장명부는 일본에서 차별당했고 한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내 조국은 대한민국도, 일본도 아니다. 나는 조국이 없다.”
 

삼미 시절 동료 임호균 “한국말 서툰 장명부, 국내 선수들과 못 어울려”

임호균


삼미 슈퍼스타즈 시절 장명부와 ‘원투 펀치’로 활약한 선수가 임호균(호서대 야구학과 교수·사진)이다. 장명부가 30승을 한 1983년에 임호균도 12승을 올렸다. 임호균의 제구력은 프로야구 역대 베스트에 꼽힐 정도였다.

장명부와의 불화 때문에 임호균이 롯데로 트레이드 됐다는 소문이 있지만 정작 본인은 “인천 출신인 내가 장명부 가족이 살 집을 알아봐 줄 정도로 챙겼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장명부는 성격이 모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는 얘기들이 많았다. 워낙 실력 차이가 커 국내 선수들이 콤플렉스를 느낀 부분도 있고, 장명부가 한국어를 거의 못해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장명부의 야구 실력에 대해 임 교수는 “베스트로 던지면 구속이 145km 정도 나왔다. 컨트롤도 괜찮았고 무엇보다 일본 프로야구를 경험해 타자와 승부 하는 요령이 뛰어났다”고 했다.

요즘은 한 시즌 200이닝 이상만 던져도 ‘혹사’ 얘기가 나온다. 장명부는 83년에 427이닝을 던졌다. 임 교수는 “나도 그 해 234이닝 던졌다. 둘이서 거의 마운드를 책임졌다. 당시 계약 관계도 있었고, 투수로서 욕심도 있었다. 팀이 워낙 약했으니까 오늘 지고 내일 또 선발로 뛴다고 해도 감독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고 했다.

장명부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 돼야 할지 묻자 임 교수는 “프로야구 초창기 장명부·김일융·백인천 등 일본에서 활약했던 선수들이 수준을 한 단계 높여준 게 사실이다. 비록 말년이 아름답지 않았지만 장명부의 경험과 기술이 한국 프로야구 발전에 기여한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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