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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농구대통령' 허재, 그가 기아를 떠나지 않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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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가정’이란 없다. ‘선택’이 있고, ‘선택’에 따른 ‘결과’만 있을 뿐이다. 스포츠 역시 마찬가지다. 플레이를 위해 선택을 하고, 그 선택으로 인한 승패만 있다. 승부의 세계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가정’마저 없다면, 역사와 스포츠 모두 ‘재미’가 떨어진다. 특히, 스포츠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의미는 ‘재미’. 결과론적으로만 스포츠를 바라본다면, 스포츠는 우리에게 너무 빡빡하게(?)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스포츠 팬들이 “만약에 ~~ 했다면...” 혹은 “만약에 ~~ 하지 않았다면...”라고 가정해본다. 그게 스포츠로부터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재미임을 알기 때문이다.

<바스켓코리아> 필진도 마찬가지다. 일반 독자와 전혀 다를 바 없다. 스포츠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정법’만으로 소주 몇 병을 비워낸다. ‘가정법’의 재미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에’라는 카테고리를 이번에 준비했다.

Intro. 허재는 기아에서 어떤 존재였나?

허재의 별명은 ‘농구대통령’이다. 신체 조건과 운동 능력부터 남다르다. 동 포지션 대비 균형 잡힌 체격에 탄탄한 근육, 폭발적인 스피드와 빼어난 탄력 모두 갖췄다. 여기에 돌파와 슈팅, 패스와 승부처 해결 능력, 승부 근성 등 농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녔다. 한국 농구에서 다시 나오기 힘든 선수였다.

중앙대를 졸업한 허재는 기아자동차에 입단했다. 유재학(현대모비스 감독)-정덕화-한기범-김유택 등 기라성 같은 선배가 포진한 기아자동차. 허재는 뛰어난 멤버와 함께 기아자동차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기아는 1988~1989부터 1992~1993까지 농구대잔치 5연패를 달성했다. 그 후 1994~1995부터 두 시즌 연속 농구대잔치를 제패했다.

KBL이 1997년에 창설됐고, 기아자동차는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현 울산 현대모비스)로 변모했다. 허재는 원년 시즌에 통합 우승을 차지했다. 1997~1998 시즌에는 준우승 팀 최초로 플레이오프 MVP를 차지했다. 이는 KBL 역대 유일한 기록. 프로농구가 들어선 후에도, 허재는 기아에서 ‘상징’ 이상의 존재였다.

그러나 1997~1998 시즌 종료 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허재가 기아 유니폼을 벗게 된 것. 허재는 데릭 존슨과 함께 원주 나래(현 원주 DB)로 트레이드됐다. 대신, 기아는 정인교(숭의여고 코치)-제이슨 윌리포드를 데리고 왔다. 이번 가정법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주제는 ‘허재가 기아를 떠나지 않았다면?’이다.

If 1. 허재가 나래로 가지 않았다면, 기아는 어떻게 됐을까?
김우석 : 
김우석 : 당시는 정말 ‘충격’이라는 단어로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팀의 심장과 같은 허재의 트레이드 소식을 접하게 되었기 때문. 
하지만 기아는 1998-1999시즌 허재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9연승을 한 차례 기록 하는 등 31승 14패로 정규리그 2위에 올랐다. 
강동희, 김영만 콤비에 3년 연속 기아에서 뛰는 제이슨 윌리포드가 건재했다. 챔피언 결정전까지 진출했다. 그렇게 허재 트레이드 사건은 해피 엔딩이 되는 듯 했지만, 사실상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전성기는 이때가 마지막이 되었다. 
이후 외국인 선수 선발의 아쉬움과 국내 백업 선수 부재로 인해 성적이 추락하기 시작했고, 2000-2001시즌에는 9위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부산에서의 역사를 뒤로 하고 울산 모비스 오토몬스가 되었다. 첫 해 성적은 10위. 원주 TG 엑써스와 함께 공동 18승 36패를 기록했지만, 상대 전적에서 뒤지며 순위표 마지막을 차지해야 했다. 
현역 시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의 리더십이 사라지면서 팀 성적 역시 곤두박질 치게 된 셈이다. ‘만약’이라는 가정에 불과하지만, 허재의 기아 이탈은 결국 실패라는 단어로 귀결되고 말았다. 
체질 개선과 세대 교체를 이유로 진행된 트레이드가 결국 독이 되어 돌아왔던 기아의 당시였다. 

손동환 : 허재의 기량이 이전 같지 않았다고 하지만, 허재는 여전히 경쟁력 있는 선수였다. 기량 이상의 가치를 지닌 선수다. 독보적인 카리스마와 리더십으로 동료들을 이끌 수 있는 리더였기 때문이다. 강동희(K 농구교실 단장)-김영만-클리프 리드가 있었기에, 기아의 경쟁력이 몇 년은 갔을 거라고 본다. 허재 본인이 다른 팀에서 뛰고 싶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그래도 기아 팬으로서는 아쉬웠을 것이다. 기아 팬이었던 본인 역시 허재의 트레이드를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김영훈 : 1998-1999 시즌, 허재가 없이 치른 첫 번째 시즌이었다. 기아는 정규시즌 2위를 했고, 챔프전에 올랐다. 제이슨 윌리포드-클리프 리드에 강동희-김영만가 만든 결과였다. 허재가 없어도 정규시즌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챔프전 결과는 1대4. 기아는 현대에게 정상의 자리를 내줬다. 만약 기아에 허재가 더해진다면 적어도 해당 시즌 챔프전은 1대4(현대 우승, 기아 준우승)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승팀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If 2. 허재가 나래로 가지 않았다면, 나래는 어떻게 됐을까?
김우석 : KBL을 통틀어 ‘행운’이라는 단어에 가장 가까운 선수가 허재였다고 본다. ‘신인 드래프트’라는 단어로 한정지으면 그의 가치는 더욱 높다. 
허재 입단 이후 TG는 KBL 역사상 3대 센터 중 한 명인 김주성을 얻는 행운과 함께 했고, KCC 감독 시절에는 하승진을 선택하는 믿기 힘든 현실과 조우했다. 
TG는 KBL 시작과 함께 창단한 구단으로, 성적에 비해 약체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허재 입단 이후 명문 팀으로 거듭나게 된다. 2002-2003년 김주성 입단 이후에는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하며 강 팀의 이미지까지 구축하게 된다. 
이 부분도 어느 정도는 ‘농구 선수’ 허재가 갖고 있는 ‘기운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TG에서 농구 선수로서 인생을 마감했다. 
그 역시도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성적이 조금씩 하락하기 시작했고, 결국 2003-2004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택했다. 47경기에 나서 평균 11분 정도를 출전했고, 평균 득점이 2.3점에 불과했지만,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여전했다. 40승 14패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는데 보이지 않는 공헌을 해냈다. 
허재는 나래에서 시작해 삼보와 TG까지 변화가 심했던 당시, 농구 불모지 원주 농구 팀인 TG에 농구 혼을 불어넣는 역할을 해냈다고 본다. 

손동환 : 개인적으로 허재가 나래로 가지 않았다면, 나래는 우승 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후에 일어날 결과론적인 것들을 보면 그렇다. 허재는 운이 좋은 남자로 알려져있다. 대어급이 나오는 신인 드래프트에 1순위를 여러 번 뽑은 건 유명한 사실이다. 특히, 허재가 원주에 있지 않았다면, 원주가 2002~2003 시즌 전 김주성을 뽑을 수 있었을까 생각한다.
허재는 2002~2003 시즌에 김주성과 함께 TG 삼보(현 DB)를 챔피언 결정전 우승으로 이끌었다. 2003~2004 시즌에도 정규리그 우승을 견인했다. 김주성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홀로 섰다. 허재가 없었다면, 김주성이 홀로 서기 힘들었다는 뜻이다. 나래가 허재의 실력-카리스마-운을 얻지 못했다면, 원주는 그저 그런 농구 도시로 남았을 수 있다. 전개 과정이 이상했지만... 개인적으로 여기에 관한 생각은 확고하다.

김영훈 : 나 역시 허재가 나래에 가지 않았다면 2002~2003 시즌 우승은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김주성이라는 대형 센터가 중심인 팀이었으나 허재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 
우승 시즌 허재의 평균 득점은 8.1점에 불과했다. ‘허재’라는 이름값에 비하면 많이 저조한 수치였다. 하지만 4.6개의 어시스트가 그가 코트에 있었던 이유를 증명했다. 챔프전 역시 마찬가지. 허재는 5.7점을 기록했지만 5.7개의 어시스트가 득점을 대신했다. 
허재라는 베테랑이 팀에 있었기 때문에 나래의 우승도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허재가 없었다고 하고, 당시 대구 동양의 멤버를 떠올려보면 어떨까. 허재 없는 나래와 김승현-김병철-마르커스 힉스가 버티고 있었던 디펜딩 챔피언 대구 동양의 맞대결. 확정적인 답변을 내기는 힘들지만 동양이 51대4 정도로 우세했지 않을까 싶다.       

If 3. 허재가 나래로 가지 않았다면, 허재의 마지막은 어땠을까?
김우석 :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기아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기억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농구 역사에서 ‘허재’라는 이름은 NBA의 마이클 조던의 명성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기아에서 트레이드를 선택할 만큼 많은 뒷담화를 보유했지만, 그의 마지막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냥 한국 농구를 대표하는 슈팅 가드였다. 아직도 그를 능가하는 선수는 없다. 근처에 간 선수도 없다고 본다. 다재다능함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았던 그의 현역 시절 활약을 어떤 이슈도 막아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손동환 : 거기에 관한 생각은 크게 해보지 않았다. 사실 허재는 어디서든 농구대통령이었다. 역량과 카리스마, 리더십은 쉽게 변하지 않는 항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스운 생각을 하나 해봤다. 허재가 기아에 있었다면, 기아가 어떻게든 김주성이나 대형 신인을 얻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운 역시 쉽게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게 하지 못해도, 기아는 허재를 중심으로 선수 영입을 했을 거라고 본다.
결론을 말하자면, 허재는 어디서든 마무리를 잘한 선수였을 것 같다. ‘농구대통령’이라는 위엄을 보여줬을 것 같다. 다만, 기아에 있었다면, 기아의 지금 프랜차이즈인 현대모비스에서 영구결번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김영훈 : 앞서도 말했듯이 허재가 있었다면 98-99시즌 챔프전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는 기아와 허재의 운명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허재의 나이도 불혹에 가까워졌을 때이다. 그가 떠난 뒤 기아는 다음 시즌을 제외하고 플레이오프에 단 한 번도 오르지 못했다. 
허재가 나래에서 했던 플레이를 생각하면 2000년대부터는 대량 득점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때문에 기아를 상위로 올리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농구대통령이라는 명성에는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영웅의 화려한 말년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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