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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축구 명경기 열전⑤] 어떻게 한국은 '세계 최강' 브라질을 이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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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한국에서는 ‘韓축구 명경기 열전’이라는 시리즈를 통해 수많은 경기 중 한국 축구사에 전설로 기억된 위대한 한 경기를 파헤쳐 되돌아봅니다.

-1999년 3월 친선경기 vs브라질

[韓축구 명경기 열전①] 홍명보-서정원, 5분의 기적으로 무적함대를 세우다
[韓축구 명경기 열전②] 황선홍-홍명보에 당한 독일 "5분만 더 있었다면 졌다"
[韓축구 명경기 열전③]역사상 최고 한일전 ‘도쿄대첩’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韓축구 명경기 열전④] TV 역대 최고 시청률의 전설, 투혼의 벨기에전
[韓축구 명경기 열전⑤] 어떻게 한국은 ‘세계 최강’ 브라질을 이겼나

▶경기전 개요

‘[韓축구 명경기 열전④]’에 소개된 1998 프랑스 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 벨기에전을 통해 한국은 사상 초유의 월드컵 중 감독 경질을 겪고도 전국민의 박수를 받는 대표팀으로 거듭났다.

TV 역사상 최고 시청률이 나온 벨기에전을 기점으로 K리그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한다. 마침 안정환-이동국-고종수로 대표되는 트로이카 3인방이 K리그에 떠오르고 1998년 8월 역사상 첫 10만관중을 돌파하는 등 한국 축구는 봄을 맞이한다.

이렇게 절정기를 달리던 한국은 1999년 3월 28일 나이키 초청 3월 A매치로 브라질을 잠실주경기장으로 불러들이게 된다. 당시의 브라질은 약 8개월전 열린 1998 프랑스 월드컵 준우승팀이자 경기 4일전 발표된 1999년 3월 피파랭킹에서 세계 1위(2위 월드컵 우승팀 프랑스)를 기록하고 있던 팀.

게다가 당시는 브라질 축구의 황금시대였다. 1994 월드컵 우승-1998 월드컵 준우승-2002 월드컵 우승에 1995 코파 준우승-1997 코파 우승-1999 코파 우승을 차지하는 황금시절이었다. 가히 '세계 최강'이라는 말이 '세계 1위'라는 말보다 더 당연했다.

비록 많은 이들이 기대한 호나우도는 한국에 오지 못했지만 당시만큼은 호나우도보다 더 세계적으로나 브라질 대표팀 내에서 입지가 대단했던 히바우두가 선발로 나선다.

1999년 3월 당시 히바우두는 얼마나 대단한 선수였을까. 바르셀로나 소속이었던 히바우두는 일단 직전시즌인 1997~1998시즌 스페인 라리가 올해의 외국인 선수상을 받는다. 그리고 시즌 막바지가 진행중이던 1998~1999시즌은 끝내 라리가 37경기 24골을 기록하는데 이는 히바우두 전체 커리어 중 단일시즌 리그 최다 득점을 기록한 해였다. 게다가 1999년 히바우두는 브라질 대표팀으로 13경기 8골을 기록했는데 이 역시 브라질 유니폼을 입고 한해 넣은 최다골 타이였다(2000년과 동률).

이후 열린 1999 코파 아메리카에서 브라질에게 우승컵을 안기기도 한 히바우두는 결국 1999년 발롱도르와 피파 올해의 선수상을 모두 거머쥔다. 즉 당대 전세계 1위 선수가 한국을 찾은 것이다. 현재로 치면 리오넬 메시가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이끌고 한국에 온 것이다.

히바우두가 전부가 아니였다. 브라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풀백으로 평가받는 카푸, 왼쪽의 지배자였던 제 호베르투, ‘무회전킥의 마술사’ 주닝요 등도 선발 출전했다. 이외에 세르징요, 파비오 콘세이상, 상파울루 원클럽맨 호제리우 세니 골키퍼 등 알만한 팬들은 모두 아는 브라질의 실력자 선수들도 함께했다. 즉 결코 브라질이 허약한 멤버를 끌고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한국도 허정무 감독을 필두로 홍명보-유상철-황선홍으로 이어지는 수비-미들-공격의 척추라인과 하석주, 김태영, 이임생, 노정윤 등이 뛰었다. 그래봤자 브라질 입장에서는 아시아의 작은 팀이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름 한국은 브라질을 상대로 그전까지 선방해왔다. 한국과 브라질의 첫 친선전이었던 1995년 경기에서는 고작 0-1로 밖에 지지 않았고 1997년 평가전도 김도근의 골로 1-2로 패했었다.

당시 일본이 브라질에게 1995년 두 경기를 해서 0-3, 1-5 대패와 1997년 0-3 대패를 당했던 것을 비교하면 스코어적으로도 일본보다 훨씬 나은 한국이었다.

▶홍명보의 방어와 패스, 김병지의 선방 스페셜

21년전인 1999년 3월 28일 서울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린 이 경기는 예상대로 흘렀지만 또 예상대로 가진 않은 경기였다.

당연히 브라질의 파상공세가 이어졌다. 객관적 전력에서 큰 우위에 있는 세계 1위 브라질은 브라질 특유의 자유로운 공격 축구로 한국을 압박했다. 여럿 좋은 기회를 맞았고 한국은 실점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엔 김병지 골키퍼가 있었다. 당시 김병지의 위상은 정말 대단했다. 김병지는 1999년 연봉 2억 2000만원을 받았다. 특수포지션인 골키퍼였음에도 1998 프랑스 월드컵 주전 골키퍼이자 ‘꽁嗤疸???문화 아이콘, 그리고 압도적 실력으로 4대 프로 스포츠를 통틀어 연봉킹 자리에 올랐을 정도였다.

이런 김병지는 가히 브라질전 한 경기로 ‘스페셜 영상’을 찍는다. 히바우두 등 당대 최고 선수들이 골을 노리고 때리는 슈팅을 거짓말같은 반사신경으로 선방해낸다. 히바우두의 바나나처럼 휘는 코너킥에도 당황하지 않고 쳐내는 것은 물론 전반 중반에는 ‘윙병지’ 특성이 발동되며 사이드라인 근처까지 나와 공격수를 젖히고 패스를 시도하기까지도 한다.

놀라운 선방으로 김병지 골키퍼가 무실점으로 막아내자 브라질 선수들은 당황한다. 공격에 우위를 보여도 골이 들어가지 않으니 우왕좌왕한다. 문전에서 좋은 기회때 선수 두 명이서 엉켜서 슛이 하늘로 떠버리는 상황도 나온다.

브라질 공격이 당황할 때 홍명보는 3백의 중심에서 침착함을 유지했다. 중앙에서 철통수비는 기본이며 오른쪽, 왼쪽, 최전방으로 탁월한 긴패스를 찔러주기도 한다. 또한 중앙 투톱이 공을 뺏기 위해 압박할때면 둘 사이를 매우 부드럽게 빠져나가는 탈압박까지 선보이며 이날 경기 숨은 ‘하이라이트 제조기’가 되기도 했다.

물론 모든 기적의 경기에는 운은 필수다. 브라질의 좋은 슈팅은 김병지의 선방에 막히거나 혹은 매우 살짝 골대를 빗나가는 등 브라질 입장에서는 묘하게 운이 나쁜 상황이 지속되기도 했다.

▶후반 종료 직전 김도훈의 인생골, ‘세계 최강’ 브라질을 잡다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한국의 골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러자 브라질 내에서도 균열이 생겼고 한국의 최전방 공격수 황선홍도 그 틈을 타 몇 번의 좋은 기회를 맞기도 한다. 특히 후반 막판 오른쪽에서 최성용의 크로스 이후 브라질 수비를 지나 황선홍 앞에 공이 떨어져서 맞이한 왼발 슈팅기회는 골과 다름없었지만 골키퍼 정면으로 향하며 아쉬움을 삭히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에게도 몇 번의 기회가 찾아오며 ‘혹시나’하는 마음을 가지던 후반 종료 직전인 44분 기적이 일어난다. 이임생이 상대 공격을 저지한 후 홍명보에게 패스했고 홍명보가 수비를 젖힌 후 오른쪽의 최성용에게 패스를 내준다. 최성용은 공을 잡은 후 한 번의 터치 이후 곧바로 전방의 김도훈을 보고 낮은 크로스를 시도한다.

이 크로스는 브라질 두 명의 수비 사이에 있는 김도훈에게 정확하게 연결되고 김도훈은 공이 떨어지는 타이밍에 정확히 맞춰 넘어지며 오른발 슈팅을 한다. 이 슈팅은 그대로 가까운 포스트 구석 아래에 꽂히고 김도훈은 태평양같은 가슴팍을 활짝 펼치며 달려가 무릎을 꿇고 포효한다.

이 득점 직후 얼마되지도 않아 그대로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고 그렇게 한국은 브라질을 1-0으로 이긴다.

▶현재까지도 아시아팀이 브라질을 이긴 유일한 경기

김도훈 현 울산 현대 감독은 이 브라질전 골에 대해 훗날 “내 인생골”이라며 “그 골이 들어가는 데는 최성용의 기막힌 어시스트가 있었다. 그 골을 만들기 위해 이임생이 몸싸움으로 볼을 빼냈고, 홍명보가 드리블을 해서 최성용까지 연결했다. 만드는 과정이 정말 좋았다. 나는 그저 들어온 공에 발만 대서 넣기만 했다”고 회상한다. 또한 “20년 전의 일인데 지금도 생생하다. 내겐 그거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흐뭇해한다.

김도훈이 그렇게 흐뭇해하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 득점으로 한국은 브라질을 이겼고 2020년 3월 현재까지 아시아팀이 A매치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이긴 유일한 경기로 남아있다. 브라질이 어떤 나라인가. 눈만 뜨면 전국민이 축구를 하고 축구 선수들이 해외에서 외국인선수로 나가 벌어들이는 돈이 GDP에 반영될 정도라는 가히 '축구의 나라'다.

피파랭킹 1위를 꺾은 기념비적인 경기이기도 하다. 한국은 19년 후 독일을 이기며 또 다시 피파랭킹 1위를 잡는 역사를 쓰기도 한다.

당시에는 세계와 한국축구의 벽이 더 높았다. 한국에는 유럽에 진출한 선수도 찾아보기 힘들었고 당연히 상대 전력분석 역시 잘 되지 않았다. 냉정하게 지금보다 더 ‘우물 안 개구리’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당시 세계 1위, 1년전 월드컵 준우승팀이자 3년후 월드컵 우승팀이 되는 브라질을 잡아냈다는 것은 이 경기가 아시아 축구사에도 기념비적인 경기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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