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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금성, 대적 불가였던 '무적 황소'

한창 뜨거워야 할 피치가 아직 차갑게 식어 있다. 코로나19가 이 땅의 모든 축구를 식힌 탓이다. 덩달아 우리들의 가슴도 달궈지지 않아 서늘하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언제고 다시 뜨거워질 K리그를 기다리며, 과거 <베스트 일레븐(월간 축구)>이 전한 기사와 함께 지난 37번의 시즌을 돌아봤다. 큰 이슈부터 작은 기록까지 가능하면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고, 당시의 생생함을 전달하기 위해 잡지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사진으로 옮겼다. 아직 숨죽이고 있는 K리그를 기다리는 데 ‘K리그 타임머신’이 작은 보탬이 됐으면 싶다. / 편집자 주


새로운 10년을 맞이한 1990년이었던 만큼, 한국프로축구대회도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일단 1990년부터 ‘2군 리그’가 운영됐다. 일화 천마(現 성남 FC)를 제외한 다섯 개 클럽이 2군 리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데 중지를 모았고, 덕분에 여러 신인 선수들이 2군 리그에서 경험을 쌓으며 훗날 훌륭한 선수로 거듭나는 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2군 리그 첫 시즌엔 포항제철 아톰즈(現 포항 스틸러스)가 우승을 차지했다.

반면 ‘리그 흥행’이라는 관점에서는 냉정히 말해 실패였다. 한국프로축구연맹에 따르면, 1990년 리그의 총 관중은 52만 7,850명이었다. 평균 관중은 5,865명으로 집계됐는데, 전년도에 비해 대략 600명이 줄었다. 그 때문인지 1990년의 <베스트 일레븐>엔 축구 발전을 위해 팬 서비스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유독 자주 포착된다.

흥행 실패의 가장 큰 원인으로는 연고지 문제가 거론되곤 했다. 당시 프로 축구는 도시 연고제를 추진했으나 완벽한 정착 단계는 아니었다. 일례로 1라운드는 모조리 제주 종합운동장, 2라운드는 마산 종합운동장에서만 치러졌는데, 리그 초반의 열기는 전혀 느낄 수 없을 만큼 관중석이 썰렁했다. 다행히도 시즌을 거듭할수록 각 클럽의 연고에서 경기가 벌어지는 일이 많아지긴 했다. 대우 로얄즈(現 부산 아이파크)는 부산, 럭키금성 황소(現 FC 서울)와 일화는 서울, 포항제철은 포항, 현대 호랑이(現 울산 현대)는 울산을 택했고, 유공 코끼리(現 제주 유나이티드)는 경기도를 순회하며 광역 연고제의 개념으로 시즌을 치렀다. 어쨌거나 이 시기는 연고지 관점에선 과도기를 지나는 중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대우는 한국 최초로 외국인 감독을 선임하는 강수를 뒀다. 모기업의 지시로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외인 사령탑을 물색했는데, 그래서 한국에 상륙하게 된 인물이 프랑크 엥겔이다. 동독 출신의 엥겔 감독은 이전에 동독 연령별 대표팀을 지휘한 이력이 있었다. 대우는 이방인 엥겔 감독과 압박 축구를 실현하며 1990시즌 리그에서 나름대로 족적을 남겼다. 아울러 1989시즌의 유공이 ‘테드 효과’를 톡톡히 보며 우승을 차지하자, 다른 클럽들도 너도나도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는 유행이 일기도 했다.

이 시즌이 개막 직전엔, 럭키금성이 만들어낸 ‘미담’으로 축구계가 훈훈해지기도 했다. 럭키금성 선수단은 구단 마사지사 박정규 씨가 아내의 병원비로 어려움을 겪자, 주장 최진한 선수를 필두로 선수 전원이 돈을 모아 2백만 원을 전달했다. <베스트 일레븐> 1990년 1월 호에서는 “럭키금성 선수들은 인정이 많다”라며 그들의 선행을 잊지 않고 소개했다. 그러고 보면, 구단 전체를 가족처럼 여겼던 선수단의 따뜻한 마음씨와 하나 된 분위기가 럭키금성의 1990년 쾌속 질주를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베스트 일레븐> 1990년 12월 호에 보면, 1990년의 럭키금성은 시즌 초반만 하더라도 약체군으로 평가받았던 모양이다. 포항제철과 대우 같은 팀의 위세는 물론 디펜딩 챔프 유공의 파워도 만만치 않아 럭키금성의 역주를 예상하는 시선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럭키금성은 모두를 비웃듯 시즌 초반부터 맹렬하게 달렸다. 거침없이, 정말 거침없이 달리며 정상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당시 <베스트 일레븐>은 럭키금성의 질주를 이렇게 표현했다. “럭키금성의 올 시즌 우승은 그들을 약졸로 몰던 주위 경동을 일축하는 정신력의 결과였다.”

럭키금성은 포항제철을 1-0으로 이기고 리그 1위가 된 어린이날 이후로 시즌이 끝날 때까지 단 한 차례도 타 클럽의 추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작년 막판 유공에 우승을 내준 게 한이 됐는지, 자만하지 않고 어느 때보다도 꾸준하게 달렸다. 그 결과, 럭키금성은 ‘31경기 연속 득점’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일찌감치 우승을 확정한 럭키금성의 고재욱 감독은 그들의 성공 요인을 이렇게 평가했다. “구단 관계자들의 정성어린 지원.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의 필승 정신이 한 데 어우러져 이같은 영광을 안을 수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 시즌을 미담으로 시작한 럭키금성의 그해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도 좋았으며, 그들의 단결력이 챔피언 타이틀을 선사했다고 여길 수 있을 듯하다. 럭키금성은 타 팀에 비해 스타플레이어가 부족한 상황이었음에도 오롯이 조직력으로만 왕좌에 앉았다.

럭키금성의 우승 말고도 1990년에 주목할 사건은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포항제철의 국내 최초 축구전용구장 건립이다. 포항제철은 11월 구장을 완공했고, 바로 이곳이 현재의 포항을 있게 한 ‘스틸야드’다. TV보다 재미있는 박진감 넘치는 경기장을 마련해 팬들을 모으고자 했던 포항제철은 한국 프로 축구 최초로 전용구장까지 갖게 되며 밝은 앞날을 예고했다. 포항제철은 이듬시즌부터 스틸야드에서 경기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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