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닭이 된 황태자 "내년엔 월드컵 접수"

[경향신문]

거친 러시아 리그 두 시즌 뛰며 볼소유권 회복·몸싸움 등 발전
벤투호 합류하며 키플레이어로 급부상…‘대표팀 96라인’ 형성
“내년 월드컵 본선 출전 보장된 것 아냐…꼭 필요한 선수 될 것”

지난 25일 고향 대전에서 화촉을 밝힌 황인범(25·루빈 카잔)에게 2021년은 여러모로 평생 기억에 남을 해다. 삶에선 소중한 단짝과 만났고, 본업인 축구 선수로는 성장을 확인했다.

2022 카타르 월드컵 본선 티켓이 걸린 최종예선이 황인범에게는 극적인 복귀 무대였다. 부상과 불운이 겹치며 사실상 2년 가깝게 태극마크를 내려놨던 터. 그는 올해 9월 파울루 벤투 축구대표팀 감독(52)의 부름을 받자마자 모래밭에 빠져 있던 한국 축구를 비단길로 이끌었다. 2차 예선에서도 고전하던 한국은 험난한 최종예선에서 4승2무의 성적으로 본선행 8부 능선을 넘었다. 결혼을 위해 잠시 귀국한 황인범은 최근 기자와 통화하면서 “나 홀로 해낸 일이 아니라 형들이 도와줬기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 러시아에서 성장…벤투 운명도 바꿨다

황인범의 화려한 복귀는 벤투 감독의 운명까지 바꿔놨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답답한 경기력에 경질설까지 나돌았던 벤투 감독이 이젠 내년 본선을 여유있게 준비할 정도로 입지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높은 볼 점유율을 바탕으로 경기 흐름을 지배하는 벤투 축구의 완성도가 달라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축구 전문가들은 그 키 플레이어가 바로 황인범이라 말한다. 황인범이 2선과 3선을 부지런히 오가면서 전방에 패스를 배달하는 동시에 상대의 공세를 막아내는 1차 저지선 역할까지 도맡았다. 스포츠통계 전문업체 ‘옵타’가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황인범은 최종예선 6경기에서 가장 많은 패스(424회)를 성공했다. 특히 경기장을 삼분할해 상대 수비가 밀집된 지역을 의미하는 어태킹 서드에서 152번 패스를 배달했는데, 이는 한국을 넘어 아시아 12개국 전체 1위에 해당한다. 미드필더에게 중요한 중원 싸움에서도 정우영(알 사드)과 함께 볼 소유권 회복 26회로 공동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제 몫을 해냈다.

황인범은 “너무 뛰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신나게 뛴 기억밖에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부족한 부분을 조금씩 채우려고 노력하니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 사실 나 자신은 아직 변한 게 실감이 나지 않지만 많은 분들이 칭찬해주니 이제 그런 것 같다”며 웃었다.

■ 싸움닭으로 변신한 황인범

황인범의 성장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몸싸움 능력의 변화다. 그는 2019년 아시안컵만 해도 상대 선수와 몸싸움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그랬던 황인범이 거칠기로 소문난 러시아 프리미어리그에서 2년간 뛰며 싸움닭이 다 됐다. 황인범은 첫 시즌 경기당 볼 소유권 회복과 몸싸움 승리가 각각 5.2회와 3.1회에 그쳤지만, 이듬해인 이번 시즌에는 6.8회와 4.6회로 크게 늘어났다.

황인범은 “K리그에서 뛸 때는 몸싸움을 좋아하지 않았다. 몸싸움을 하기 전에 상황을 끝내는 스타일이었는데, 유럽에서도 그런 축구를 하려면 공을 100배는 더 잘 차야 하더라”며 “웨이트 트레이닝도 많이 하면서 몸싸움을 잘하는 법을 익히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실 몸싸움도 타이밍이더라. 상대와 부딪칠 때 몸을 낮추고, 지더라도 피하지 않는 게 중요한데 어느 순간부터는 재밌어졌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특별 메뉴도 준비하고 있다. 바로 승리의 보증수표라 불리는 ‘세트피스’다. 황인범은 “염기훈 선배님처럼 공을 바닥에 놓는 순간 뭔가 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받는 선수가 되고 싶다”면서 “데드볼 상황에서의 킥력은 선수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는 큰 무기”라고 말했다.

황인범이 세트피스의 매력을 느낀 장면이 있다. “2019년 부산 동아시안컵 홍콩전에서 전반 45분 프리킥으로 골을 넣은 적이 있죠. 대표팀에서 코너킥은 몇 번 찼는데, 프리킥으로 골을 넣은 것은 이게 처음이에요. 오른발은 세워놓고 차는 게 편하고, 왼발은 굴러가는 공에 더 좋은 편이니 조금 더 연습을 해야죠. 요샌 (기)성용 형과 (신)진호 형이 어떻게 차는지 영상으로 연구하고 있어요.”

■ “2002 월드컵 키드의 꿈 …본선 뛰고 싶어요”

벤투호의 황태자로 불리는 황인범은 1996년생 동갑내기 황희찬(울버햄프턴)과 김민재(페네르바체), 나상호(서울)와 함께 ‘96라인’으로 대표팀을 이끌고 있다. 이들이 내년 카타르 월드컵 본선에서도 한국을 이끌어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황인범은 “본선행이 확정된 것도 아니고, 내가 월드컵에 간다는 보장도 없다. 그 기회를 잡기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라고 몸을 낮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월드컵 본선 출전에 대한 갈망을 감추지 않는다. 황인범은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를 보며 축구 선수의 꿈을 키운 월드컵 키드다. 황인범은 “고향집 앞 공원에서 월드컵 단체응원을 했던 내가 월드컵 본선에서 뛸 수 있다면 너무 행복할 것 같다. 한국 축구에 필요한 선수로 살아남는 게 나의 숙제”라고 말했다.

황민국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